12화.결혼 전 장인어른의 마음을 얻는 법

리분동지 신혼(그림) 일기

by Jessie

#Jessie

88년 천칭자리 / 서호주 사막 여행자로 살던 중 우연히 만난 남자와 지구별, 서울시에서 사는 중 / 회사와 맞지도 않으면서 회사원 코스프레하며 사는 중 / 외롭고 힘들 때 요가, 달리기, 글쓰기, 와인 마시기를 함


#DJ

86년 전갈자리 / 바리스타 8년의 경력을 살려 호주 카페에서 영어 한 문장 구사만으로 취업 /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세가 되어있음 / 사회운동가이자 한때 가수 지망생(tmi)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겠다며 혼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스페인으로 떠날 때도 반대가 심했던 아빠였지만 취업이 모두 결정된 상태에서 계약이 불발되며 5개월 째 백수였던 내가 다시 호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셨다. 계약서도 제대로 없는 회사에 일을 하러 간다며 아빠는 제 정신이냐며 내 뺨을 때리셨다.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도록 해줬는데 또 무엇이 그렇게 결핍의 이유가 되는 것이냐며 아빠는 나를 멈추지 않고 때렸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붙잡으며 나에게 방으로 도망가라고 울었다. 새벽이 다 되도록 엄마의 훌쩍거리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지만 나는 그 것이 마침내 잠잠해질 즈음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왔다.


새벽 4시, 그렇게 집을 나와야 할 만큼 나는 호주에 가야만 했던 걸까. 아빠는 떠나는 나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나는 너를 더 이상 딸로 생각하지 않으니 너도 이제 집에 들어오지 마라"







울면서 비행기를 탔다. 내가 한 결정을 다시 돌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동안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삶을 이어갔다. 때론 컵라면 하나가 하루의 유일한 끼니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곳에 와야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전화 한통, 문자 한통 제대로 하지 못한 채 3년의 시간이 지났다. 할아버지는 병상에서 나를 찾으셨다고 했는데 난 할아버지의 마지막도 보지 못한 채 먼 땅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흘러가는 시간과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내 자신을 보면서 괴로울 때가 많았다. 여전히 비어있는 통장과 뒷자리가 커져가는 나이를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중,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회사의 한 달 프로젝트 인터뷰에 참여했던 그는 매니저였던 나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많이 해왔지만 평범한 외모에 비해 그의 첫인상은 조금 더 선명하게 남았다. 그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눈이 깊은 사람 그래서 자꾸 그 눈을 가진 이의 삶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첫 눈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던 마음을 다독이느라 힘들었던 나에게 한 달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그가 먼저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4년의 연애 공백기동안 무뎌졌던 마음도 그제서야 녹아내렸다. 나는 그를 만나고 운전을 배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 숲 속 캠핑을 떠났고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국립공원에서 별을 봤다. 짧다면 짧을지도 모를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한국에 돌아와 그는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처음엔 몇 번이고 나를 외면했던 아빠는 그의 3번째 방문에서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함께 술을 마시러 가자고 제안하지 않았다면 아빠와 내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입을 몇 번이고 다독이며 나는 그제서야 3년 간의 시간들을 "잘못했어요"라는 말로 뱉어낼 수 있었다. 아빠는 "결국 자식을 이길 수 있는 부모는 없다"며 내가 어렵게 내민 손을 잡았다. 이기적이었던 내가 돌아오지 않는동안 아빠의 두꺼운 손은 세월이 많이 묻어 있었고 엄마는 테이블 한 켠에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결혼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레 꺼내어 본격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던 중, 내가 강원도로 1박 2일 출장을 간 사이 아빠는 그의 명함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저에게 딸을 주십쇼"라는 말을 비장하게 하며 결혼을 하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꿈꾸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에게 나 몰래 내려오라는 말을 건내고 아빠는 우리 동네의 자랑인 석쇠 불고기를 그에게 사주시고 바로 사나이의 뜨거운 술자리를 가지셨다고 한다. 소주 10병을 마시는동안 두 사람은 아빠의 단골집이라는 가게도 다녀오고 노래방에서 2시간이나 춤을 추며 사나이의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빠의 핸드폰에는 '아들같은 사위'라는 연락처가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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