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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Oct 15. 2019

남편은 청춘과 가방을 바꿨다

32살의 생일 선물


 

남편과 나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바야흐로 3년 전, 그는 한 번의 실패를 겪고 무작정 떠난 호주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이었고 나는 그의 흔들리지 않는 말 하나를 믿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30년 간 살아오던 대구를 떠나 상경했을 때 그는 혼자 계신 어머니의 삶을 걱정하느라 정작 본인의 손에 쥐어진 돈이 서울대 입구역에서도 버스를 타고 몇십 분을 달리고 또 비탈길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자리한 고시원에서 살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을 아마 알지 못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현실은 꽤나 남루해서 외투 하나 살 여유조차 없었고 뼈까지 시린 그 겨울은 할인 행사를 하고 있던 갑판대 위에 싸게 내놓은 롱 패딩 하나로 힘겹게 버텼던 기억이 아주 선명했다. 누구 하나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를 가진 것도 우스웠지만 가난한 서로가 만나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180만 원의 인턴 월급으로 방 값을 내고 나면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사치는 신대방 역전 옆 온기를 가득 품고 있는 포장마차였다. 만원 한 장을 들고나가면 배부르게 술에 취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우동 한 그릇과 닭꼬치 한 접시 그리고 소주 한 병의 사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글프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행복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남자 친구였던 그는 지난 3년 동안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일을 했고  영업이라는 직업을 핑계로 일주일에  적어도 4일은 술을 마셨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반짝거리던 호주에서의 모습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어서 서울에 돌아온 우리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런 서로의 모습을 누군가가 깊은 잠에 들어야만 곁에서 오래 지켜볼 수 있었다. 가끔 술에 취해 그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몇 시간씩 쏟아내는 그를 보며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원망도 하고 애석해하기도 하며 결혼을 선택한 것은 과연 내가 현실을 모르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서인지를 오래 생각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면 나아진다는 삶은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다. 연봉이 높지 않은 신혼부부에게 내려지는 혜택은 꽤 솔깃한 것들이어서 우리는 서울 한 복판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되었고 드디어 온전히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공간이 넓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작은 여유가 생겼다. 누군가는 두 사람이 살아가는 집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작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5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살았던 우리는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고 오늘 우리를 담고 있는 10평 남짓의 집은 우리가 살아온 흔적들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조금씩 나아지는 삶이 우리에겐 더 어울리는 것이라 믿으며 우리는 나아진 삶만큼 더 많은 사람들을 품으며 지내왔다. 우리 역시도 그 누군가가 품어준 덕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





 스타트업이라는 생태계에서 일을 하는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가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책임감이 무거워진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고 모든 일에 능통해야 하는 만큼 회사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집에 있는 시간도 핸드폰으로 쉼 없이 일을 하며 함께인 시간조차도 일에 쏟아부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했고, 근교 여행을 떠나서도 일을 했으며, 명절에도 일을 했고, 결혼식 직전까지도 새벽 3시에 집에 들어왔다. 신혼여행에서까지 회사 일을 놓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과연 이 결혼이 괜찮은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는 역할은 더 많이 부여받고 나에게서 더 멀어지는 중이었지만 그의 월급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머리가 크는 동안 오후 4시에 퇴근을 해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 문화가 있는 호주에서 생활해온 나에게,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매일 함께 하며 '식구'라는 개념이 더 컸던 나에게 매일 혼자 먹는 저녁이나 혼자 카페에 다녀오는 주말은 남들보다 더 괴리감이 큰 무엇이어서 우리는 자주 다투며 감정 소모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언제나 미안하다는 말과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나 역시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못난 짝꿍이 되어 속앓이를 하곤 했다. 우리에겐 누구 하나가 이기는 싸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서로가 미안해하며 끝나곤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더 높은 직급의 사람이 되었지만 오르지 않은 월급으로 살아가는 월급쟁이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그가 32살의 생일에 가방을 내밀었다. 결혼해줘서 고맙다는, 함께 시간을 더 자주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는 내가 매일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 모습이 속상했다고 그래서 오랫동안 매주 5만 원씩을 모아 산 것이라 쑥스럽게 말하며 그것을 내밀었다. 백화점 1층에 자리하고 있는,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으레 사 오곤 한다는 좋은 브랜드의 가방 하나가 얼마나 비싼지 나는 알 턱이 없지만 분명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값어치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오랫동안 모아 온 청춘과 우리의 시간이 내 가방 하나와 바뀐다는 것이 나에게는 꽤나 목이 메는 일이어서 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방을 들고 나오지 못했다. 술에 취해 들어온 그가 벗어둔 옷들을 빨래통에 밀어 넣으며 난 꽤 어려운 마음으로 그가 건넨 가방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자주 생각했다. 아마 한동안은 그가 사준 가방을 함부로 메고 나오지 못할 거라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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