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 중 가장 간절해지는 한국의 의료서비스
9명의 친구들과 한 집 살이를 했을 때는 저녁이 되면 거실에 모여 종종 호주 생활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나눴다. 호주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들이라면 늘 현지살이의 팁을 묻느라 바빴고 그들보다 몇 개월 혹은 몇 년 더 호주 물을 먹은 사람이라면 너스레를 떨며 경험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기울이던 어느 날이었다.
"아는 친구가 일을 하다 머리를 다쳐서 피가 많이 나고 있었는데 앰뷸런스를 부르려고 했더니 극구 사양하더라고요. 그렇게 피가 나는 상황에서도 본인이 차를 운전해서 응급실까지 갔어요. 알고 보니 앰뷸런스를 본인이 원해서 탄 것이 아니라도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거의 백만 원 정도를 내야 한다더라고요"
그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호주는 6개의 주와 2개의 준주가 있는데 각 주는 모든 영역에 대해 법률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 있다. 그래서 주마다 앰뷸런스를 이용했을 때의 비용이 제각각인데 퀸즐랜드와 태즈메이니아는 본인들의 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앰뷸런스가 운영된다. 위급상황에 조금은 너그러운 두 개의 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주에서 앰뷸런스 출동 비용이 발생한다. 내가 지냈던 서호주는 $949 그러니까 한화로는 1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본인이 호출한 앰뷸런스가 아니고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출동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앰뷸런스를 타는 일이 없다면 가장 최고의 호주 라이프겠지만 나에게는 딱 한번, 호주에서 앰뷸런스를 탄 경험이 있다.
한국에서 온 3명의 친구들이 아프리카 아이들의 학비 모금을 위해 호주 대륙을 횡단할 때의 일이다. 그들이 보내온 기획안을 보면서 사막에 대한 경험이 없는 친구들이 악명 높은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 Great Victoria Desert을 횡단하는 일은 어려운 듯 보였기에 회사에서는 기꺼이(?) 이 친구들의 서포트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날 장소는 중간지점인 호주 남부의 대표 도시 애들레이드 Adelaide였다. 서호주 한인회에서 후원된 식량을 가득 싣고 애들레이드에서 첫 만남을 가진 우리는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루루 Uluru 그리고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을 건너 서호주 퍼스 Perth로 가는 루트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친구들과 크게 나이 차가 나지 않던(?) 나는 짬짬이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여정을 함께 했는데 오후 시간에는 아침에 목표한 동네에 미리 가서 텐트를 치고 아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울만한 것들을 준비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텐트를 치고 동네를 돌아보기 위해 홀로 자전거를 타고 동네 마실을 가던 참이었다. 내리막에서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사고가 났다. 정확히 그 순간이 기억나진 않지만 내리막길에서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미끄러졌고 불행히도 엎드려 있는 내 위로 무거운 MTB자전거가 내리 꽂히고 말았다. 휘어진 자전거를 질질 끌고 캠핑장으로 가는 길, 비싼 자전거를 망가트려 혼날 일만 남았다고 자책하며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쳤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낸 사고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등에 붉은 피가 가득 묻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곳은 우메라 Woomera라는 작은 마을로 마침 동네에 단 하나뿐인 작은 병원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문 닫기 30분 전에 가까스로 진료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찢어진 옷을 벗겨 내 턱과 팔 그리고 무릎을 소독을 해주던 의사는 피가 철철 흐르는 내 정수리를 보더니 아무래도 더 큰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내 나에게 물었다.
"너 보험 있니? 아무래도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일행들이 태워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시간이 별로 없으니 바로 앰뷸런스를 부를게"
정수리가 찢어져 하얀 뼈가 보일 정도였으니 아마 상태는 많이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록스비 다운 Roxby Down이라는 마을의 병원까지 나는 80km를 실려 응급실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타다 실수로 넘어져서 그 지경이 되었노라고 차마 말을 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앰뷸런스로 이송되는 동안 직원은 나에게 자면 안 된다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아마 1000불에 가까운 앰뷸런스를 이용하는 서비스에 포함된 행위였을 것이다. '젠장, 편하게 쉬게 해 주세요 제발'이라고 속으로 몇 십 번을 외치며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더 절망적이었는데 의사는 내 정수리를 보더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오.. 머리를 꿰매야 할 것 같아.."
수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즉시 그에게 물었다.
"머리를 깎지 않고 꿰맬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안타깝지만 면도를 해야 할 것 같아. 우리 간호사들이 그래도 예쁘게 깎아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길 바라. 물론 미용실만큼은 아닐 테지만 말이야"
그렇게 나는 어스름이 내린 밤, 낯선 동네에서 정수리를 휑하게 밀렸고 11 바늘을 꿰매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울지 않았다. 아직 마취의 기운이 남아있기도 했거니와 이 모든 상황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차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행들은 앰뷸런스에 나를 덩그러니 실려 보내고 곧 데리러 오겠노라 했지만 두 시간이 넘도록 그들은 감감무소식이었고 핸드폰조차 챙기지 못한 나는 병원 전화기를 빌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외로운 통화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대머리 독수리가 된 채 병원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를 보며 간호사들은 안쓰러웠는지 그들에게 배달된 치킨수프 한 접시를 나눠주었다. 그것이 나의 유일하고 강렬한 앰뷸런스와 응급실의 기억이다. 의사는 나에게 이런 상태라면 사막을 횡단하는 일은 그만두고 경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도시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나는 지독하게도 그 여정을 감행했고 (사막을 건너는 동안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에 남몰래 울며 밤잠을 설쳐야 했다) 2주의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갔을 때 한 통의 우편물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보험사에서 온 것이었다. 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던 학생 보험이 결코 저렴하지 않은 앰뷸런스 비용을 지불해 준 것이었다. 보험비 청구서를 보며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는데 우편물을 보며 알량했던 마음을 반성했다. 어쨌거나 보험은 필요한 것임을 나는 다시 확신했다.
여담으로 실밥을 풀고 소독을 하기 위해 사막으로 향하는 중간중간 병원에 들러야 했는데 나의 상태를 보며 모두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비싼 병원비(한 번 소독을 받는데 거의 $80 정도를 지불했다)와 약값에 꽤 부담을 느끼던 찰나였는데 울룰루에서 만난 한 남자 간호사로 인해 눈시울이 붉어져 병원을 나온 기억이 있다. 그는 별 말없이 투박하게 내 머리와 상처들을 소독해 주더니 도대체 왜 이 모양으로 다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커튼을 치더니 내 가방에 소독약과 붕대가 담긴 봉지를 챙겨 넣어주었다. "행운을 빌어! Good luck"이라고 말해준 그를 꼭 안아주고 돌아서서 나오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던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여정을 계기로 그들이 투박하지만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금 슬픈 일은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나에게 자전거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점이다. 머리가 11 바늘이나 찢어지는 사고였으니 자전거를 다시 타는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일 테지만 말이다. 생애 첫 앰뷸런스의 강렬한 기억과 함께 낯선 이에게 따스함을 나눠주었던 간호사 선생님들을 떠올려본다. 그 당시엔 큰 부담이었던 비싼 병원비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들이 전해준 마음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서 내 기억 속의 호주를 따뜻하게 채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