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귀빈 미용실 원장님
~ Prologue
내 기억의 가장 앞자락에 있는 것 중 하나인 불편한 그것을 꺼내고 말았다.
이상한 날이 있다. 뭘 해도 일이 꼬이고 늘 주차하던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차가 꼬이고
8살 아들, 딸 쌍둥이를 서른여덟에 낳아 45세인 지금도 힘든 육아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딸아이가 밥을 먹는다, 안 먹는다 하다 결국 밥그릇을 깨고,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말랑이공을 몰래 방에서 가지고 놀다가 결국 터뜨려서 온 방안에 알 수 없는 흰색의 진득한 액체로 만들어 놓은 아들,
두 아이 침대의 침구들을 다 빼내고 나니 산더미 같이 쌓여갔다.
갱년기를 겪고 있는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화가 주체할 수 없이 부풀러 올라갔다.
“징글징글해, 엄마가 하지 말랬지?”
“너희가 이렇게 속 썩이면 엄마 못살겠어. 너의 엄마 못하겠어”
“다른 친구들 좀 봐, 받아쓰기도 잘한다고 선생님한테 칭찬 듣는데 너희는 뭐야?”
“엄마가 너희한테 잘못했어? 죄지었어? 나한테 왜 그래?”
하지 말았어야 할 말, 내가 가장 싫어했던 말,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말들을 쏟아내고 말았다.
삼 남매를 키우며 미용실을 운영하시던 엄마가 우리에게 토해내듯 한 말들이다.
남동생 손잡고 눈물을 훔치며 집 밖으로 나올 때 다짐했다. 나는 이런 엄마 하지 말자고..
그런데 오늘 다른 눈물을 훔치며 거울을 보니 삶에 지쳐 소리 지르던 엄마의 모습이 있었다. 참 싫었는데, 거울 속 엄마는 참 안쓰러워 보인다. 그때 보지 못했던 붉어진 눈시울도 봤다.
그렇게 내가 우리 엄마가 되어간다.
- 1 : 귀빈미용실 원장님
엄마는 참 억척스러웠다.
지금은 전국에서 집값이 손에 꼽힐 정도로 비싼 마포구, 그런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80년대로 가보면 ‘밭도 있고 작은 연립단지, 주택단지, 작은 골목길에서 공차는 아이들’ 그랬다.
‘귀빈 미용실’ 엄마는 미용실을 한 20년? 넘게 운영하셨다. 지금처럼 대형 미용실에 헤어 디자이너가 있던 시절이 아닌 그때는 미용실 원장님은 나름 동네의 인싸였다. 그곳은 동네 소문의 발원지이자, 유행의 시작점이고, 최신 정보를 가장 먼저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종합 뷰티샵이었다.
생각해보면 엄마도 미용실 한자리를 내어 화장품도 판매했었다.
어린 시절엔 늘 화장에, 하이힐, 화려한 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하는 엄마가 애증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시대를 초월해 모녀 사이만큼 애증의 관계가 반복되는 사이도 드물 것이다.
도시락을 싸기 시작한 중학교 때부터는 더더욱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사춘기가 온다지만 ‘~라떼는?’ 중학교 시절이었던 거 같다. 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잠든 엄마는 유독 아침이 버거웠다. 부스스한 머리에 잔뜩 찌푸린 미간, 냉장고를 열고 멍하니 서있기도 하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삶의 무게인 것을 어린 나의 눈에는 자식에 대한 귀찮음으로 보였다. “엄마? 미안”
학교에 가 점심시간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 통을 꺼낼 때면 책상 밑에서 망설여지기 시작한다. 예쁜 도시락 통에 랩으로 반찬마다 예쁘게 플레이팅? 된 친구들의 도시락을 보면 포기상태로 반찬동을 연다. 고춧가루가 드문드문 장식하고 있는 콩나물 무침, 원래는 노란색인 주황색 달걀말이, 멸치 몇 마리, 가끔은 분홍 소시지도 계란 옷 입고 있을 때도 있다. 이 모든 게 첨엔 각자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모두가 함께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두 살 터울이지만 한 학년 차이인 남동생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누나? 미안한데 도시락 누나가 좀 싸주면 안 될까?”
“그래, 알았어. 누나가 아침에 싸놓을게”
이유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동생 고3까지 거의 매일 도시락을 싸줬던 것 같다.
고등학교 무렵이다. 장래희망을 쓰는 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화가, 피아니스트, 선생님, 등 각자의 미래 직업에 대해 야무진 꿈들을 써내려 갔다. 나의 생활기록부 아랫줄 한 켠에는 장래희망에 “현모양처”라고 쓰여있다. 그랬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명확했다. 남편한테 소리 지르지 않는 아이들 식사 잘 챙기는, 특히 도시락
역시 생각과 말의 힘은 강하다. 지금 아등바등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젠장, 자유로운 여성이라고 쓸걸, 요즘엔 가끔 자유로웠던 엄마가 부럽기도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지금은 서울 최대 번화가인 홍대입구, 홍익대학교 안에 있는 홍익여고를 다녔다. 그 당시엔 지금처럼 번화하지는 않고 정문 앞엔 커다란 햄버거 체인이 있었고 전철역 근처엔 먹자골목들이 즐비했다. 홍대 정문이 지금처럼 커다랗지 않았다. 정문 옆 부지에 모 주류회사에서 상가를 짓는다고 해서 학교 및 근처 상인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한 곳에 있었던 터라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지키겠다는 일환으로 인간띠 행사를 진행했다. 서로 손을 잡고 학교들 학교를 학생을 지키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
대부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엄마가 학부모 대표를 많이 하기 나름인데 나는 그저 중간 정도 성적에 눈에 띄는 아이도 아이였는데 우리 엄마는 학부모 대표 중 한 명이었다.
“엄마? 학교에서 내일 인간띠 행사 있대. 11시까지 오래”
“알았어”
생각해 보니 한창 손님 파마를 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잘 듣지 못했던 건지. 아마 못 이해하셨을 거다. 분명. 그렇게 믿고 싶다.
“민수아? 너희 엄마 오셨어, 와우, 짱이야”
“뭐가? 어디 계시는데?”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랑 이야기 나누시다 지금 교무실 나오셨어”
담임선생님, 다른 엄마들과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호피무늬 하이힐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미니스커트, 하늘거리고 목에 커다란 리본이 있는 블라우스, 엄마였다.
얼굴이 달아올라 수돗가에 가서 세수를 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그날 밤 엄마는 남동생에게 파스를 사 오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다리가 퉁퉁 붓고 뒤꿈치는 까졌는지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그날 행사는 3시간 참가자들이 손을 맞잡고 서있는 행사였다.
파스 붙인 종아리를 주물러 주면서 왜 그렇게 입고 와서 사람 창피하게 하고 엄마 힘들고 멋을 낼 때가 따로 있다고.. 쏘아붙였다. 아마도 그날 엄마는 아픈 다리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