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7. 목요일의 기록
어른이 되어가며 서글퍼지는 점 중 하나는 설렘과 행복의 빈도가 줄어든다는 것. 행복의 역치가 높아져 사소한 것에는 더 이상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설레는 마음은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언제 설렜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아야겠다.
- 유치원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나를 서울대공원에 자주 데리고 갔다. 엄마, 아빠, 할머니, 유모차에 탄 동생까지. 서울대공원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면 코끼리 열차를 타고 눈썹 휘날리며 놀이공원까지 달려갔다. 중간에 동물원에서 멈추기도 하지만 나는 놀이공원이 더 가고 싶었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놀이공원을 향해 달려가는 그 순간이 가장 설렜던 기억이다. 막상 놀이공원에 들어가면 무서워서 놀이기구를 타지 못했지만,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다.
그때는 놀이공원 안내 방송으로 미아를 찾는 방송이 자주 들렸다. 다리가 없는 아저씨가 바퀴 달린 보드에 몸을 싣고 카세트플레이어로 구슬픈 음악을 틀어놓고 기어 다니며 앵벌이를 했고, 다슬기와 번데기를 파는 아줌마, 바닥에 끌고 다니면 날갯짓을 하는 나비 장난감, 헬륨 가스를 빵빵하게 넣은 풍선, 비눗방울 등등.
그때 나를 설레게 했던 모든 풍경들. 언젠가 서울대공원에서 내가 당시 가장 좋아했던 벡터맨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오열해서 겨우 벡터맨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사탄 제국 나쁜 놈들이 리디아 공주를 납치해서 벡터맨 삼인방이 공주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리디아 공주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사탄 제국의 메두사가 더 미인이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메두사가 나를 더 설레게 한다는 것을.
- 10대 시절
어렸을 때는 공부를 잘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시험을 잘 보면 부모님이 뭐든지 사주셨다. 인라인스케이트, S보드, 자전거, 닌텐도, PSP 등등. 게임기를 처음 산 날, 어린 내게 마약 같은 도파민이 분비됐다. 나는 만화처럼 팔짝팔짝 뛰었고, 그날의 감정은 내 행복의 역치를 높였다. 부모님은 공부 잘하라고 게임기를 사주셨는데, 마약에 빠진 나는 그날 이후로 성적이 우하향했다.
고등학생 때, 공부는 안 했지만 학원은 열심히 다녔다. 남고를 다니던 나는 학원에서 한 여고생과 짝꿍이 되었다. 그리고 곧 사랑에 빠졌다.
당시 나는 친구의 조언을 새겨듣고 그녀와 공포영화를 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여자와는 무조건 공포영화를 보라는 친구의 말. 나는 공포영화를 일절 보지 못하는 쫄보였지만, 그녀와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보기로 했다.
그녀와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나는 파일노리에서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300원 주고 다운받아 미리 예습을 했다. 무서운 포인트를 외워 미리 대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막상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니, 깜놀 포인트를 알고 있으니 더 무서웠다. 마치 자이로드롭이 언제 떨어지는지 알고 있지만, 그걸 기다리는 순간에 더 긴장감이 샘솟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공포영화를 보거나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면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는 이론이 있다. 심장이 떨리는 것을 호감과 설렘으로 착각한다는 흔들 다리 효과이다. 물론 나는 실패했다.
20대 이후에도 나는 여러 가지 설레는 감정을 느낀 것 같다. 그러나 점점 그 빈도는 줄어간다. 가끔 어린 시절 느꼈던 설렘의 감정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직도 나는 서울대공원의 코끼리 열차를 생각하면 설렌다. 종이컵에 담긴 번데기와 구슬 아이스크림, 솜사탕을 보면 설렜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감정을 느끼기보다 익숙한 것에 익숙한 감정을 느끼는 것.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있기에 나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