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지 못한 이를 위한 사랑 고백 방법
바야흐로 봄입니다. 화단에 핀 꽃들 사이로 나비가 날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봄 풍경입니다. 가만히 보니 나비의 비행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꽃들 사이를 그냥 어지러운 곡선으로 날아다니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비는 꽃 하나를 선택하여 계속 그 근처를 빙빙 맴돕니다. 창가에서 턱을 괴고 나비를 보다가 얼마 전에 우리 교실을 방문한 꼬맹이를 떠올렸습니다.
요즘 우리 반 아이들은 아침마다 소학을 통독합니다. 자율학습 시간 십 분이 거의 서당 분위기입니다.
父生我身(부생아신)하시고 母鞠吾身(모국오신)하시며
腹以懷我(복이회아)하시고 乳以哺我(유이포아)로다….
마른논에 물들어가는 소리가 그럴 것입니다. 난해한 한자어와 송독음이 지루할 만한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흥부네 처마 밑 제비 새끼들처럼 잘도 재잘 됩니다. 그 맑은 아침 송독음을 듣노라면, 나는 과거로 돌아가 긴 수염을 가진 훈장님이 된 기분입니다.
닷새 전 아침 사자소학 시간이었습니다. 서당 분위기가 차츰 고조되어 내가 훈장님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상상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때였습니다. 우리 교실 문 입구에 꼬마 한 명이 자꾸만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형님 누나들이 한 목소리로 읽는 책 읽는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아이인가 보다 생각했지요.
그 아이는 한참이 지나도 떠날 줄 모르고, 나중에는 교실 안까지 머리를 넣고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모습이 꼭 하얀 집토끼 같았습니다. 점잖은 우리 반 학동들의 집중력은 '토끼' 쪽으로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누구를 찾아온 아이 같았습니다.
"뭐 하러 왔는데? 누구 찾아?"
그런데 꼬마가 기다리던 사람은 나였습니다.
"저는 1학년인데요… 저번에 우리 반에 왔죠?"
지난달 보결수업으로 1학년 교실에 갔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요… 색종이를 잘 접거든요. 나중에 선생님한테 선물해 줄게요"
웬 선물? 난데없는 선물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고맙다고 답했습니다. 꼬마는 코가 땅에 닿도록 넙죽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난 괜히 으쓱해져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애들아, 금방 들었지? 선생님 이 정도란다."
나는 진짜 훈장님처럼 어험 하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그런데 괜한 허풍은 아니었습니다. 첫째 시간이 마치자, 정말로 그 꼬마가 색종이로 만든 물고기 네 마리를 들고 왔습니다. 빨강 파랑 초록 회색 색종이로 접은 네 마리의 물고기였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고?
내가 그 반 보결수업에 들어가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이런 선물을 받나 싶었습니다. 난 사실 그 반이 몇 반이었는지도 아리송하고, 더군다나 그 애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얼른 벽거울 있는 곳으로 가서 내 얼굴을 다시 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이 상황을 목격한 우리 반 아이들도 꽤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우리 반 선생님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나?' 하는 선망의 눈빛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향해 한껏 여유 있는 미소를 보냈습니다. 자고 나니 유명해졌더라는 말이 실감 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시간 마쳤을 때, 우리 반 아이들이 교실 앞문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또 왔어요!"
쳐다보니 그 토끼였습니다. 꼬마는 이번에는 허락도 받지 않고 바로 쪼르르 교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이 손에 또 색종이로 접은 물고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어이쿠, 이제 그만 줘도 되는데?"
속으로는 '어휴, 이 귀여운 것!' 하며 꼬마가 가져온 선물을 접수하려던 찰나, 꼬마가 손에 든 것을 얼른 뒷 춤으로 감추었습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더 바싹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습니다. 말인즉, 이번에는 선생님이 아니라 어떤 누나한테 주겠다는 것입니다. 머쓱해진 내가 재빨리 손을 거두고 그 누나가 누구인지 물어보았습니다. 토끼는 망설이지 않고 가운데 모둠에 앉아 있는 선영이를 지목했습니다.
"선영아, 1학년 동생이 너한테 선물 주고 싶단다."
선영이 천진한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우리 반 35명의 눈도 휘동 그래 졌습니다. 내가 그 꼬마에게 갖다 줘도 된다는 눈빛을 보내자, 꼬마는 누나 오빠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당당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손에 든 색종이 물고기를 선영이에게 불쑥 내밀었습니다. 착한 선영이 볼이 발그레해지며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내가 토끼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선영아 괜찮다. 선물이란다. 받거라."
고분고분 착한 선영이는 마지못해 받았습니다. 그때 쏟아지는 함성과 웃음과 박수 소리. 통 큰 토끼는 앉은키가 제 키와 비슷한 호랑이 선배들 사이를 지나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눈도 덜 떨어진 것 같은 1학년 토끼가 4학년 호랑이 소굴을 그렇게 뒤집어 놓고 갔습니다. 꼬마는 애초에 내가 아닌 선영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대범한 데다가 주도면밀하기까지 한 토끼에게 내 비록 부지불식간에 배신을 당했지만, 그 속에 나비처럼 자유로운 풍경 때문에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