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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나

가을의 선물

by 쓱쓱

오늘은 종일 바람이 분다.

가을이 아침저녁 영리하게도 바람에 자신의 기운을 조금씩 실어 보내고 있다.


계절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공기를 모아 바람을 만들어 보내며 세상을 향해 슬슬 시동을 건다.


자, 이제 내 차례야.


한참을 기다리던 이에겐 참으로 반가운 전갈이다.


아아,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살며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이한다.

바람은 피부에 닿은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빠르게 몸으로 흡수된다.

그리고는 더 깊은 마음의 심연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겨우 눈을 떠 보면 파란 하늘이 보인다.


가을이 보낸 바람은 우리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한다.

바람이 파랗게 물든 맑은 하늘에 뭉개 뭉개 걸려있는 하얀 구름을 싣고 유유히 함께 흘러간다.

온몸이 파랗게 물들고 마음이 쾌활하게 맑아진다.


이내 해야 할 것들과 해야만 하는 것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열됐던 마음에도 뭉게구름이 흐른다.

바람이 함께 데려가는 방향대로 천천히 자유롭게 부유하듯 흘러간다.

잠잠해지고 고요해지고 쾌적해진다.


광활한 우주와 한 톨의 먼지 같은 인간의 접점이 생기는 찬란한 순간이다.


먼지 같이 작은 인간의 마음에 온 우주가 담기고

미지의 우주와 일치된 인간이 우주의 크기만큼 무한히 확장된다.


그렇게 만물과의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 있지도 없지도 않은 진공의 상태를 경험한다.

최초의 입자로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했던 것처럼 가볍고 단순하게 그러나 분명히 실존한다.

과학자들의 말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는 황홀한 순간을 상상한다.

한없이 가볍게 허공에 부유하는 동안 물성이 사라진 온전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다 다시 바람이 불면

사방에 퍼져있던 나의 입자들이 황급히 모여든다.


자,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아쉽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모여든 입자들로 존재의 형태가 조금씩 완성되면 마음속 뭉게구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마법 같은 바람과의 여행을 마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추상적인 개념들이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는지에 대해

행복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보며 주는지에 대해

불안이 무엇을 통해 가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을 통해 깨닫는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바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오늘 가을이 내게 주는 선물과 같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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