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집에서 일하던 두 달
시간이 흐르고 흘러 2주라는 시간만 남았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던 연구도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연구 발표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보고서 제출도 한 달이 남았지만 연구소에서 일하는 시간은 고작 2주뿐이다. 다음 주 금요일에는 5월에 택배로 받았던 노트북을 반납해야 한다. 팀원들이 앞으로 뭐할지 정했냐는 질문을 간간히 던진다.
"인턴 마치고 뭐할 거야?"
"모르겠어. 어렵네."
이 기한이 끝나면 다시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그 불안함 속으로 뛰어들겠지. 쉽지 않을 시간들이라는 걸 안다. 어차피 헤쳐나가야 하는 그 시기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도 노트북 두대가 웅웅 소리를 내며 열심히 돌아간다. R 공장이 되어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결코 밝지 않는 시기에 뛰어들기 전에 조금은 특별했던 6개월이라는 기록을 되짚어본다. 불안했고, 두려웠던 시기를 견뎌냈기에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재택근무는 조금 특별했다. 봉쇄령이 내려지고,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첫 출근은 침대 옆 책상이었고, 논문들을 읽으며 새로운 것들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몰아치던 과제와 시험에서 벗어나 정해진 하나의 주제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새로웠고, 모르는 게 많았기에 도장깨기 하듯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이번 주 나의 삶은 읽는 생활이다. 하루 종일 논문을 읽고 저녁에는 책을 읽는다. 활자 사이를 수영하며 지내는 중이다. 새로운 용어들을 배운다는 건 재미난 일이다. 어떤 분야인지 용어를 잘 모르지만 분자학, 생물학, 약학,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새롭게 마주하는 것들은 내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는 분야라는 걸 나타내기에. <2020년 4월>
처음 해보는 것들에 마냥 신나 있었다. 사수와는 프랑스어로 소통하고, 연구는 영어로 하고 막연히 바라기만 했던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내가 언제 인턴을 재택근무로 해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턴은 특별하다. 긴 호흡으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기회도. 내가 얼마큼 이 연구들을 해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했던 지난 인턴 생활들과는 다른 경험이 주어졌다. 읽는 만큼 내가 그려낼 수 있는 게 달리질 것이다. <2020년 4월>
날씨가 좋지 않기에 내 마음도 흐려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날들도 있다. 일하기 좋은 날은 대체 언제인지. 힘들어하는 나를 손잡고 이끌어야 했던 건 미래에 고생할 나였다. 5월은 나를 다독이는 말들로 가득했다.
오늘은 흐리고 바람도 불고 춥다. 딱히 일하고 싶은 날은 아니다. 일하고 싶은 날이 있었나.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안 좋으면 안 좋다고 하기 싫은 게 일이지. 바람이 세차게 분다. 꾸준히 할 일을 해야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2020년 5월>
매일 쌓아온 일들이 모여 결과물이 된다.
매일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있을 보장은 없지만,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는 없다.
일어나서 일하는 삶을 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당장 내일 상황이 어떻게 될지조차 모르지만, 오늘은 충실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에, 다이어리에, 메모장에 잊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되새겼다.
일어나서 일하는 삶을 살겠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충실히 쌓아가느냐가 나를 결정한다.
오늘의 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고 하루하루를 쌓아온 과거의 내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2020년 5월>
한껏 흔들렸던 날들이 있다. 죄책감으로 하루를 보냈던 날. 오늘 제대로 하지 않아서 다가오는 날들이 더 불안했던 날. 무너지지 않게 다독이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해야 하는 것들이 그 존재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걸 평생 품고 가는 게 인생이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 오늘 하루 못했다고 모든 게 무너지지 않는다. 내 삶은 견고하게 쌓여있기에.
그냥 하면 되지. <2020년 5월>
사수가 던지는 질문이 족쇄처럼 느껴졌을 때도 있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벌써부터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싶어 드릉드릉했다. 사수에게 부담 가득했던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고, 혼자 끙끙 앓던 시기가 무색하게 마음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사수와 미팅을 했다. 혼자 조급하게 생각하고 부담 가득했던 일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큰 부담을 내가 스스로에게 안겼구나. 아무도 감시하지 않고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다. 꾸준히 내가 잘하면 된다. 모르는 거, 못하는 게 당연하니까. 더 오래 조사하고 많이 읽을수록 내가 만들어낼 결과가 좋을 것이라 믿는다. <2020년 5월>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이 길을 간절하게 원하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눈 앞에 있기에 걸어가는 것일까 질문을 던졌다.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들이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 글자 속에 마음을 꽂아 넣고 나면 잠시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한다면 뭐든 하겠지만. 나에겐 막막하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 분야에 저렇게 애정을 쏟고 온 시간과 열정을 쏟는 모습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공부를 할 때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인가? 왜 필요한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일을 할 때는 과연 그런 질문을 던지고 뛰어들었나. 한편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거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알지 못하는 분야를 내가 가늠해서 판단할 수 있는가? 무작정 셔터를 닫아 버리고 나를 가두는 게 아닐까? 지금 인턴을 하는 연구도 내가 안다고 생각해서 한 건가?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산 봉우리에 서서 무작정 외치기만 하는 기분이다. 아 어떻게든 되겠지. 떠오르는 질문들 사이에서도 난 열심히 할 것이고, 못할 일은 없다. <2020년 5월>
때론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그리고 흔들리는 현재에.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할 것이라 믿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감정이 몰아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에 놓여있다. 어떻게 될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가 있을지. 어느 하나 정해진 게 없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두려움도 불안함도 껴안고 살아가는 수밖에.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내가 나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런데 무너지면 다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완주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오늘 하루도 내일 하루도 꽉 채워야만 하지는 않다. <2020년 5월>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혼자가 아닌 삶에 대한 고찰도 했다. 내 삶을 굴려온 건 나라는 존재를 함께 지탱해줬던 사람들이라는 걸 느꼈다. 나에게 나눠주던 그 마음들이 내가 무너지지 않게 잡아주고 있었구나.
내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삶이라는 걸 혼자 굴려 가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든다는 걸 배우는 중이다. 나의 삶이라고 자부했던 것들이 실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굴려주었기에 굴려왔구나 싶다.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건 가끔을 의미했던 건데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 생활할 줄은 몰랐다. <2020년 5월>
나를 지탱한 건 가족들이 아낌없이 보낸 사랑이었고, 흔들리는 나를 바로 잡아준 건 엄마였다. 가족을 위한다며 그 오랜 시간을 묵묵히 뒤에서 지켜온 엄마는 다시 대학교에 입학해 배움의 길로 뛰어들었다. 움츠려 드는 나에게 손을 건네고, 해도 된다고 해보라고 말을 건넨 건 엄마였다. 항상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해준 건 그리고 무엇이든 하라는 말을 해준 건 엄마였다. 하루는 엄마에게 투정했다.
"엄마, 나 내가 뒤쳐진 것 같고 너무 돌아가는 것 같아서 불안해."
그럴 수 있지. 근데 엄마는 조금 늦더라도 네가 원하는 걸 하는 걸 응원해.
공부는 평생 하는 거야. 빨리 한다고 그게 꼭 더 나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
도전하고 새로운 것들을 탐구하는 사람이 된 건, 내가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항상 사랑을 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언제나 내가 가는 길을 존중하고 힘을 주기에. 아 힘들어라는 말보다 "버텨볼게. 일 년만 더 해볼래."라는 말을 하게 된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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