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JO 지나친 조각들 Dec 07. 2021

어쩌다 보니 연구실은 처음 이어서요

[프랑스 척척 연구원 생존기] 우리는 모두 3인분 역할을 해내는 중이다

8월부터 연구실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였다. 사기업, 국제기구, 병원 인터뷰를 봤지만 연구실은 처음이었다. 조금은 다른 인터뷰였다. 첫 인터뷰에서는 나를 어필하는 과정이 대부분이었는데, 여기서는 한 시간 중 90%는 보스가 자신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랑 내가 아마 맡게 될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나를 시험하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상세하게 프로젝트를 설명해준다고? 자신은 과학이 너무 좋다면서 진심이 담긴 설명에 마음이 혹했다. 이때 알았어야 했다.... 보스는 말하는 걸 매우 매우 매우 좋아한다. 



질문 3가지 정도 하려고 PI방에 들어갔다가 두 시간 뒤에 나왔다. 미팅에 들어가기 전에 동료들은 "행운을 빌어"라며 말을 건네도 누구든 미팅을 마치고 터덜터덜 나오는 이를 보면 "고생했다"라는 말을 건넨다. 처음엔 왜 그러나 했는데 정말 운이 필요하다. 그 운은 뒤에 미팅이 있는지 보스가 바쁜지 여부이다. 매번 뒤에 미팅이나 약속이 없으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쭉 넘긴다. 기가 빨린다. 피곤하다. 나도 만만치 않게 말이 많은 사람인데 강적이 나타났다. 



연구실은 랩디렉터(Prinpical Investigator : PI)가 모든 권한을 갖는다. 우리는 한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지만 결국 내가 속한 곳은 보스의 연구실이기에. 젊고 생긴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팀이라 스타트업에서 일하면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실은 PI(랩디렉터)가 존재 이유이자 정체성이다. 펀딩을 받아오는 것도 발표를 하는 것도 모두 PI의 일이다. 그가 가진 특색이나 성격이 이 연구실의 가치와 방향을 결정한다. 이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는 곳이 또 있을까. 보스는 젊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건 일을 벌이길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 일은 누가 하나? 우리는 모두 최소한 3인분의 역할을 해내는 중이다.



이 팀이 특이한 건 10명이 되지 않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면역체계와 유전병에 대한 연구를 하는 팀이지만 바이러스학, 면역학, 약학, 생물정보학, 생물학을 전공한 동료들이 있고 2/3은 실험을 하고 1/3은 분석을 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만큼 혼자 그 분야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내가 풀지 못하는 내 분야의 문제를 랩실 동료들이 도와줄 수 없기에 학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해결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이지만 서로가 문제 상황에 마주쳤을 때 딱히 유용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 수 없다.



아 물론 나는 생물학 수업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통계를 전공하고 제약회사에서 마지막 연구인턴을 했을 뿐이다. 보스도 안다. 인터뷰 때 "나 생물학에 대해 아예 몰라. 수업조차 들어본 적 없어."라고 말했더니 "괜찮아. 아무도 제대로 아는 사람 없어. 과학이란 이런 거야."라고 보스가 안심시켜줬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과 아예 알지 못하는 건 다르지만... 뭐 모르면 배우면 되니까.


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업무로 지원했는데 보스가 그 자리는 경력직을 채용하기를 원하고 나의 경력을 보니 Computational Biologist 자리가 나을 것 같다고 그렇다고 네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 건 아니라며 다른 업무를 제안했다. 어쩌다 보니 양심이 찔리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우리 팀은 보스가 살아온 연구실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자신이 공부를 하면서 발을 내밀었던 분야를 긁어모았고, 마지막 카드가 나였다. 뉴욕 연구실에서 자신만 실험을 하는 면역학자였고 팀원들은 모두 수학자나 통계학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생물학자와 통계학자들이 부딪히는 부분을 잘 안다고 8년 동안 온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고 했다. 데이터를 보고 기대하는 결과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기에 이상한 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며 툴툴거렸다. 보스는 수학자나 통계학자나 별 구분을 두지 않는다. 수학하는 애들로 퉁친다. 이해한다. 나에게 생물학자나 바이러스학자나 면역학자나 다 똑같이 보이니까. 퉁 치는 거지 뭐.



나의 첫 질문은 

그래서 세포가 뭐야...?


다행히 보스는 8살짜리 애가 있다. 아마 그 어린이가 나보다 과학 지식이 많을 것이다. 매주 나랑 미팅을 하는 시간에 왕 기초 수업을 보스에게 들었다. 동료들은 내가 마구잡이로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줄 수가 없다. 원래 기초가 가장 어려운 법이다. 동료가 자기 어릴 때 봤다며 애니메이션을 추천해줘서 한동안 귀여운 세포들로 생물학 공부를 했다. 생물학은 알록달록 색깔들이 풍부한 학문인 것 같다.


Une fois dans la vie 애니메이션

세포들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연구실도 여러 사람들이 보완하며 지내는 곳이었으면 좋겠지만 실은 각 연구실마다 치열한 눈치싸움과 세력싸움이 존재하고 모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공간이다.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품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cited to discover and to understand
마음껏 흡수하고 질문해야지.
두려워할 이유도 불안에 잠식될 이유도 없다.
앞으로 천천히 해나가면 되지.
- 8월 10일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https://brunch.co.kr/magazine/chuckchuck


https://brunch.co.kr/@jijo/148

https://brunch.co.kr/@jijo/151

https://brunch.co.kr/@jijo/141

https://brunch.co.kr/@jijo/118

https://brunch.co.kr/@jijo/117

https://brunch.co.kr/@jijo/116

https://brunch.co.kr/@jijo/63

https://brunch.co.kr/@jijo/60

https://brunch.co.kr/@jijo/84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감에 대한 갈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