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우리 집도 이사를 갈 즈음이었다. 지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면 이사갈 집이 보이는 거리였다. 결혼하고 사실상 처음과 마찬가지인 신축 아파트에 살려고 들어온 지 2년 만에 전세로 내 놓았다. 그리고 20년도 더 지난 오래 된 아파트로 들어갔다.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신축 아파트에 한번 맛을 들이면 구축 아파트에서는 못 산다고들 했다. 그럴 만도 하겠다. 편의시설이랑 조경이 무척 좋아서 구축 아파트에 가면 모든 것이 다 허접하고 불편하리라. 하지만 사느라 바빠 우리는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그걸 다 누리지 못했다.
어제 그제는 날씨가 참 좋았다. 근처 공원까지 걸어가보았다. 햇살이 좋았다. 오래된 아파트여도 주인이 도배도 새로 해주고 문까지 시트지를 붙여 준다고 해서 완전 헌 집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서관도 근처에 있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새롭게 이사 가는 아파트에서는 공원가기가 훨씬 가깝고 편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지하주차장에서 아파트로 바로 연결되지도 않고, 식탁 놓을 자리며, 김치냉장고 자리도 어렵고, 책장도 다 들어갈지 고민이 되는 상황이긴 했다. 이삿짐 센터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고 하지만, 같이 가져갈 수 없는 책이 너무 많아져서 아침부터 책 정리 하느라 벌써 허리가 아파온다.
오늘 읽은 책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아스퍼거스 증후군, 즉 자폐 스펙트럼을 앓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폐 스펙트럼을 결혼한 파트너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접촉하면 불편을 느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오고 했지만 그것을 그저 자신의 결함으로만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아차렸고, 그래서 최대한 그녀를 존중하며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야기의 전개는 이렇다. 좋을 줄 알고 이사를 했는데 그녀에게 공황이 찾아올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넓은 집으로 갔으니 좋겠다고 입을 모아 칭찬을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것이 너무 두려워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쉬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우리도 이사 일정이 조금 남아서 집 주인이 도배도 해주고 이곳저곳 손봐준다며 애를 썼다. 10년 정도 사용한 블라인드가 있는데 사용할 의향이 있는지 묻길래 한번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하고 이사갈 집을 찾아갔다. 작업자 두 분이 벽지를 뜯어내고 있었다. 실제 거실을 보니 베란다 확장을 했지만 사각형 기둥이 튀어 나와 있어서, 지금 거실에 있는 책장과 스피커가 다 들어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책장만 겨우 들어갈 것 같아서 스피커는 반대편 쇼파 옆으로 배치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음악을 귀 뒤로 듣는 격이 된다.)
책을 읽다가, '공황'이라는 단어만 발견하면 감정이입이 된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지는 마음의 수준이 공황이 일어날 것만 같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해가 된다. 공황, 패닉 상태는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공황장애로 힘든 일을 겪었고 약을 먹고 있으니 그 맘 백배 이해가 된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집에 늦게 도착하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걸었고 밤 늦게 들어가서도 부모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집은 늘 저기압 상태였고 늘 고성과 추함과 폭력이 상주했다. 그 폭력은 언어폭력과 정서폭력을 포함해 부모님 두 분의 격렬한 직접적인 상태이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싫어야 공황을 느낄 정도로 힘들까.
하지만 지금의 내 집, 내가 가장인 지금의 집은, 퇴근하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더 늦게 들어가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지 않는다. 오히려 얼른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고 싶고 하루종일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이상하다 생각하기보다, 저 사람에게는 나와 다른 어떤 아픔이 있을 수 있구나,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다. 사랑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그게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