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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Apr 02. 2024

(독서가 취미2) 책 읽는 것이 취미가 될 수 있을까

취미란에 당연하게 또는 당당하게 '독서'라고 적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독서라고 적으면서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취미라는 것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 첫 번째 뜻풀이이고,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이 두 번째 뜻풀이다.



취미라는 주제를 가지고 <호비클럽으로 오세요>라는 책을 펴낸 취미 전문가 황지혜 작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는 줄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정작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고 했다.



사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은 모두 취미란 말인가. 취미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음악도 즐겨 듣고, 책도 즐겨 읽고, 웹툰도 즐겨 보고, 넷플도 즐겨 보고, 인스타도 즐겨 하고, 친구와 가끔 방탈출도 가고, 영화도 관람하고, 여럿 모여서 떡볶이나 튀김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또 가끔은 근사한 스시를 먹으러 가기도 하고, 국가대표가 나오는 축구경기도 물론 즐겨 시청하고, 친구에게 너무 재밌다는 드라마 얘기를 들으면 무슨 일을 제쳐놓고 본방을 사수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그러니 즐겨하는 것이 너무 많은데, 과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딱 하나만 적을 수 있는 그 '취미'라는 칸 안에 우리가 '독서'를 적는다고 하면, 그 독서는 어떤 수준의 독서여야만 하는 것일까.



<호비클럽으로 오세요>에서 황지혜 작가가 인용한 다른 작가의 글을 다시 인용해보고자 한다.



칼 세이건의 딸인 사샤 세이건은 에세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에서 온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삶은 '작은 조개껍데기나 우표처럼 작고 예쁜 물건을 수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호비클럽으로 오세요, 10쪽)



그러니까 취미라는 것은, 작은 삶, 작은 수집, 작은 일상에서 누리는 작은 행복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거창하게 수상보트를 즐기거나 패딩 글라이더를 타거나 경비행기를 운전하는 취미가 아니어도, 내 삶속에서 나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작은 조개껍데기 같은 것, 햇살에 반짝이는 작은 돌멩이를 발견하고 그걸 보고 감탄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취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아침 산책을 하면서 길가에 돌틈에 들판에 피어나는 작은 꽃을 발견하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작은 생명이 내 주위에 많이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나는 건강을 위해 걷기 운동을 하지만,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면 사진으로 남겨놓기 위해 자주 멈춘다. 그림자가 꽃에 드리우지 않도록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방향을 틀고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꽃이 너무 작으면 접사 모드를 이용하기 위해 카메라를 조정한다. 이런 모든 일은 내게 큰 기쁨을 준다. 그 꽃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내가 가는 길에 그 꽃이 그저 피어있음으로 인해, 존재함으로 인해 나는 기쁨을 느낀다.



내가 취미칸에 당당하게 독서를 적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작은 기쁨이 책을 읽을 때에도 나에게 한결같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내게 독서란 마치 산책을 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고개를 쏘옥 내밀고 있는 작은 꽃, 노란꽃, 흰꽃, 보라꽃과 같다. 그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홀로 떨어진 곳에 외따로이 있는 꽃을 보고, 땅에서 얼마나 자랐는지, 몇 송이가 피었는지, 얼마나 작은 꽃인지, 잎이며 가지는 어떤 모양인지를 살펴보는 것처럼, 책을 읽을 때 나는 그런 마음이 된다. 



예전에도 나는 당당하게 취미란에 '독서'를 적었다. 그때는 책을 참 많이 읽었다. 1년에 100권은 기본이었고, 매달 15권씩을 독파하더니 어느 해는 200권을 넘기기도 했다. 그때는 독서에 대해서는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거야 하는 우쭐한 마음으로 누군가가 책에 대해 물어오기를 은근히 바랐다. 만약 지금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 하고 묻는다면 아, 지금 한 열 권을 동시에 읽고 있어서 다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그래도 한 권만 물어보신다면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네요.라고 지적 허세를 가득 풍기면서, 그러나 매우 겸손한 모습으로 나를 자제하며 말했을 것이다.



그때는 시간이란 시간은 모두 독서에 쏟았다. 그러니까 시간이란 개념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밥을 먹고 하는 등의 일상적인 것들로 인한 시간을 제외한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독서 까페에 가입해서 매달 몇 권 읽었습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올렸다. 이번 달은 17권밖에 못 읽었네요, 하면서 겸손인 척 자랑을 했다. 그러면 회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지 칭찬을 했고, 나는 독서 교만이라는 늪에 빠졌다. 독서를 하면 속이 알차져야 하는데, 오히려 책을 읽을수록 속은 더 비어져만 갔다. 헛배만 불렀다. 세계문학은 다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 책은 계속 생겨났다. 안 읽은 책이 왜 이리 많은지 각 출판사마다 세계문학을 쏟아냈고, 젊은 작가들의 신작도 계속 출간되었다. 나는 신간을 가장 먼저 읽고 사람들에게 후기로 알려주는, 얼리어독서가인 양 했고, 안 읽은 책이 거의 없는 것처럼 독서를 했다.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다는 사람이 이 책을 안 읽었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의 '독서'도 나쁘진 않았지만, 지금 취미란에 '독서'라고 당당하게 적을 수 있는 '독서'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달에 거의 평균 15권 이상을 읽었다. 15권씩 읽었다고 계산하면 1년이면 180권이 된다. 거의 10여 년을 그 정도 수준으로 책을 읽어왔다고 보면 된다. 나는 흔들리고 복잡한 지하철 틈바구니 속에서도 휴대폰으로 책을 읽었다. 조금 틈이 생기면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종이 책을 꺼내서 읽었다. 퇴근할 때는 이북 리더기로 책을 읽었다. 한 정거장을 가더라도 책을 읽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시간에 웹툰이나 게임 하는 것을 보면 쯔쯔 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아이쇼핑을 했고, 어떤 사람은 여러 앱 화면을 계속 바꾸면서 채팅도 하고 인스타도 하고 뉴스도 읽고 유튜브 시청도 했다. 그 정신 없는 틈에서 나는 그들을 곁눈질하며 책을 읽었다. 책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나만의 표어를 만들어서, 지하철 칸에 누군가 책 읽는 사람이 보이면 괜히 반갑고 그랬다.  



물론 그때의 독서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도 나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최고 수준으로 독서를 했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는 말을 하고 싶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하면, 그냥 출퇴근 시간에만 읽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정말 재수없는 대답이 아닌가. 마치 수능 만점자가 인터뷰에서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내 독서의 80퍼센트는 출퇴근 시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솔직히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책을 읽어낸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취미'라는 정의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 미션 인증을 받기 원한 것이다. 감상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온전한 취미활동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나는 이제 한 달에 15권씩 독서를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하지 못한다.  천천히 읽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무수히 시도했었던 일이긴 하지만 늘 다음 책 읽을 생각에 방금 읽은 책에 대한 감상과 이해, 다양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다 아프게 되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출퇴근을 하지 못하면서 이제 독서는 스스로 내가 시간을 내어서 해야 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어쩌면 이제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상황에서 독서를 하게 된 것이다. 출퇴근을 없앴을 때, 나는 어떻게 독서를 하나. 이전에는 출퇴근 시간에는 독서 외에는 다른 것을 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아파서 집에만 있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직장에서처럼 일에 매이는 시간이 없고 남는 게 시간인 것 같으니 그러면 독서량이 오히려 더 늘어나야 할  것 같은데, 결과는 시간이 더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서량은 현저하게 줄었다.



그것은 내가 독서를 하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산책을 하다가 예쁜 꽃을 만나면 나 혼자 예쁜 꽃을 보고 요리조리 사진을 찍기 위해 방향을 틀고 자세를 바꾸고 하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 하나를 만나면 그런 생각의 확장을 하는 것이다. 작가와 대화를 하고, 책 속 주인공과 대화를 하고, 그 글귀가 주는 힘을 발견하고, 글귀가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에 반해서 한동안 멍하니 그 글귀만 쳐다보는 것이다. 저 단단한 책 속에 박혀있는 활자의 위대함, 활자의 아름다움, 초등학생도 알아듣기 쉬운 글자로만 적혀 있는데도 그것들이 모여서 내 머리를 치고, 골수를 쪼개고, 심장을 아프게 하는 얼얼한 기쁨.



그래서 이제 나는 취미가 독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취미란에 적을 것이 없으면 독서, 음악감상이라고 적는 사람이 아니라,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적을 수 있는 것이다. 책읽기. 나는 독서가 취미인 사람이다. 책을 읽으며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책을 즐겨 읽고 책 속에서 자신만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당하게 취미란에 '독서'라고 적을 수 있다. 취미가 독서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일인지 그것은 책을 취미로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서는 당연히 아름다운 취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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