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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에 가다

-출발하는 날

by 유영희 May 06. 2024

여행의 정의가 뭔지 모르겠다. 볼일 보러 가는 것을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니, 20여 년 전 연수차 다녀온 북경 10박 11일과 후쿠오카 3박 4일은 빼고, 큰애가 뉴질랜드에 있을 때 7박 8일, 작은애 이직할 때 두 애들과 대만 3박 4일, 이렇게 두 번이 내 해외 나들이의 전부다. 


그동안 사정이 이러니, 스위스 여행이 내 팔자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본래 여행에 큰 관심도 없을뿐더러 유럽을 여행으로 갈 만큼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애가 취리히에 간 지 3년이 되도록 갈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올해 뜻하지 않게 추가 수입이 생긴 데다 큰애가 올여름에 호주로 이주하게 되어 이번이 아니면 그나마 돈 덜 들이고 갈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결정했다. 오늘이 5월 6일이니, 4월 3일 출발 기준으로 보면,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내 생애 최장기간의 해외여행을 돌아보려고 한다.    

 

돈 얘기를 더 하자면, 연수는 당연히 내 돈이 안 들었고, 뉴질랜드나 대만은 비행기 삯만 낸 것 같다. 이번 스위스 역시 비행기 삯만 들었다. 그래도 이래저래 거의 250만 원은 들었다.  큰애는 아마 나보다 더 썼을 것이다. 8일 치 취리히 교통 티켓만 해도 60만 원이고, 취리히를 벗어나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 데다, 융프라우 등 관광지 입장료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융프라우와 마터호른에 가느라 인터라켄과 체르마트에서 각각 1박 했는데, 그 이틀 치 숙박비만도 80만 원가량 된다고 한다.  그 외에는 모두 집을 베이스캠프 삼아 당일치리로 다녀서 추가 숙박비는 안 들었다. 큰애는 나의 방문을 위해 저금도 해놨는데, 그달 월급 안에서 다 해결되었다고 한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일 게다.


누구 돈이든, 나한테 드는 경비만으로도 최소 500만 원을 태우는, 이런 여행을 내가 해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은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출발 며칠 전 한국 사람들의 해외여행이 세계 최고라는 뉴스까지 보게 되니, 과소비라는 죄책감이 더 커졌다.  추가 수입도 없고, 3년간 딸을 못 만났다는 대의명분만 없었다면 절대로 갈 수 없는 여행이다. 이런 돈 이야기를 여행기 서두에 자세하게 하는 이유는, 변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한테 하는 변명인지는 모르겠다.   

  

하필 내가 돌아오는 날 작은애가 라스베이거스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비행기 가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가방을 사야 했다. 당근을 찾아보니, 집 가까운 데서 5000원짜리가 나와 있다. 냉큼 샀다. 취리히에 큰애가 살고 있으니, 특별히 준비물 챙길 것은 없다. 주말마다 보내야 하는 칼럼 쓸 마음의 준비와 돌아오는 주말에 있을  독서 모임 책,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만 잘 챙기면 된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헝거 게임』도 챙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발목에 감을 키네시올로지 테이프는 가장 먼저 가방 깊숙이 단단히 넣었다.     


설렘도 긴장도 별로 없이 집 앞에 있는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셀카를 찍고 차에 올랐다. 비행기 표를 끊은 이후부터 아부다비에서 환승을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두 애들이 걱정이 많았다. 인천공항에서 스튜어디스에게 물어보니, 안내판 보고 그냥 죽 따라가면 된다며 너무 쉽게 말해서 걱정을 놓았다.      


비행기가 뜨는 순간의 중력이 변하는 느낌이 이상하게 좋았다. 스위스에 간다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냥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괜찮았다. 그렇다고 들뜨게 좋은 것은 아니고,  은은하게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비행기가 뜰 때 무섭다는 루머가 돌았었고, 실제로 20여년 전에는 약간 덜컹하기도 하고 귀가 먹먹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기술이 좋아진 건지 내가 둔해진 건지 이번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비행기가 땅에 닿을 때도 역시 스리슬쩍 은은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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