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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희 May 08. 2024

드디어 모녀가 상봉했지만

인터라켄의 호텔에서 생긴 일 

아부다비에서 환승할 때 공항 구경을 하라고 큰애가 말했지만, 세 시간 여유밖에 없는 데다 게이트를 못 찾을까 하는 걱정에 바로 취리히행 게이트로 갔다. 살 수 있는 물건도 없으니 어차피 그림의 떡이기도 하다. 내 눈에는 인천 공항이 더 세련되고 멋져 보여서 큰 호기심도 안 생겼다.  환승할 때는 공항 와이파이 이용할 줄도 몰라서 취리히 도착할 때까지 애들과 연락 두절인 채였는데, 그것도 괜찮은 경험이었다. 


아부다비에서는 휴대폰 배터리만 충전하고, 무사히 취리히에 도착했다.  3년 만에 만났으니 포옹이라도 해야 하나, 반가움에 겨워 눈물이라도 나올까 생각하며 잠시 긴장했는데, 아무 일 없었다. 큰애는 나를 보자마자 20시간 비행기 타고 왔는데 왜 이렇게 멀쩡해? 하면서 웃고, 나 역시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싱겁게 3년 만의 모녀 상봉은 싱겁게 끝나고, 큰애가 사는 집으로 갔다.  큰애는 처음 취리히에 왔을 때는 독채를 쓰다가 지난 2월부터 셰어하우스를 이용하는 중이다. 


큰애가 같이 사는 부부의 아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스페인 아빠와 벨기에 엄마 사이에 태어난 아기다. 겨우 걸을 만한 18개월쯤 된 남자 아기였는데, 처음 보는 나에게 안아달라는 듯이 팔을 벌려서 속으로는 잠시 당황했지만 선뜻 안아주었다. 이렇게 어린 아기를 본 것도 까마득한 기분인데, 안아보는 건 아이들 키울 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이상한 감동이 밀려왔다. 스페인 아빠는 내게 할머니 연습하는 거라며 웃었다.     


짐을 가볍게 추려서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융프라우에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 개장하는 시간에 맞춰 일찍 들어가야 해서 인터라켄에서 자야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오래 타면 그날은 쉬어야 한다던데 했더니, 큰애는 날씨 검색 결과 그때가 가장 좋아서 일정을 그렇게 잡았다면서 어차피 인터라켄에서는 쉬기만 할 거니까 괜찮을 거라고 한다. 인터라켄의 숙박 시설은 겉모습만 봐도 클래식해 보였는데, 역사 역사적 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데스크 직원에게 물어보니 200년 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우중충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고 아주 밝고 환한 분위기였다.      


인터라켄에서 1박 한 호텔, 200여 년 전에 지어져 역사 유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씻다가 낭패를 봤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서 물을 썼는데, 물이 내려가지 않는 거다. 알고 보니 건식이라 하수구가 없었다. 바가지도 없고 걸레도 없고, 그렇다고 샤워 수건을 쓰기도 아까워서 결국 두툼한 내 양말로 물을 적셔 욕조에 짜는 식으로 물기를 없앴다. 그런데 양말이 작다 보니 이게 끝이 없었다. 큰애는 침대에 누워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한마디 할 뿐 들여다보지 않는다. 점점 허리가 아파오면서 아니, 이렇게 한참이 지나는데 어떻게 화장실을 들여다보지도 않나? 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도와달라고 하기는 싫어서 결국 나 혼자 양말로 바닥의 물기를 다 닦았다. 나중에 큰애는,  '문 앞에 한국말로 그렇게 커다랗게 바닥에서 물 사용 금지라고 쓰여 있는데 어떻게 그걸 못 봐?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바닥에서 물을 쓰면 한국말로 쓰여 있겠어?'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아가 났다. 아니, 엄마가 양말로 바닥 물 닦느라 고생한 건 안중에도 없고 안내문 못 본 것만 나무란다고? 3년 만의 모녀 상봉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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