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예뻐지는 양배추
이런 양배추는 시장과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어지간해서는 예쁘다 생각이 들지 않는 그냥 흔한 양배추다. 양배추가 이렇게 진열되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 누군가의 정성 어린 손질이 필요하다. 한 박스에 적게는 5개에서 많게는 예닐곱 개의 양배추가 들어 있고 대개 정리가 안 되어 있다. 소비자에게 어필할 만한 상품이 되기 위해서 너덜거리는 겉잎을 덜어낸다거나 벌레 먹고 상처 난 부분을 잘라내 매끈한 상태로 단장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쳐 진열된 양배추들을 보게 되면 절로 예쁘다 소리가 나오게 된다.
청과상에서는 매일 아침 막내 판매직들이 이 작업을 하게 되는데 소분을 하는 나는 코 앞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곤 한다. 아침마다 늘 한결같이 깔끔하게 양배추를 손질하고, 양배추를 손질하며 부산해진 바닥을 정리하고, 정성스럽게 진열한 양배추들에게 좋은 곳으로 가라며 마치 귀한 딸 시집보내는 아빠의 눈길을 건네는 그였다. 그가 말한 좋은 곳은 어디일까. 소중하게 요리되어 행복하게 식사하는 식탁이려나!
아마도 식당을 하시는 사장님인가 보다. 좋은 양배추는 아침 일찍 오지 않으면 다 팔려 없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장님은 늘 그저 그런 양배추만을 사가시곤 했다. 그게 늘 아쉬우셨는지 넌지시 소분 직원에게 좋은 양배추를 좀 남겨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고 그 직원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소분직원은 아침마다 양배추를 다듬는 판매직원에게 좋은 양배추를 한두 개만 따로 빼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아침마다 양배추를 다듬으며 좋은 양배추를 고르는 그의 진심 어린 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건가? 저 놈이 낫나? 매일 고민 끝에 그날 최고의 양배추를 선택하는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나는 그 정도면 양배추값 더 받아도 되겠다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진 최고의 양배추는 소분직원에게 전해졌고, 오전 10시쯤 채소를 사러 오는 사장님은 소분직원을 통해 따로 보관해 둔 양배추를 받아 들며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의 인사가 양배추를 고르고 고른 판매직원이 아닌 소분직원에게 전해지는 모습은 좀 이상했지만, 양배추를 다듬고 고르는 판매직원은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같이 최고의 양배추를 골랐다. 덕분에 식당 사장님은 삶의 질이 올라갔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1호점과 2호점에는 각 매장을 책임지는 관리자로 각각 팀장님이 한 분씩 있다. 사장님으로부터 제품 가격을 전달받아 다른 직원들에게 안내하거나 그날의 판매상황에 따라 가격을 조정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집객과 모객을 해 매장의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다른 곳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있던 가게는 모두 이른 나이에 이 일을 접하고 경력을 쌓은 어린 팀장님들이었다. 앞서 양배추를 다듬는 막내 판매직원은 말이 막내지 40대 중반인 나보다도 나이가 한참 많은 형님이다. 단지 판매직 중 입사시기가 가장 최근일 뿐이다. 시장의 가게에도 당연히 위계가 있는 법이라 모든 직원들이 암묵적인 서열 안에서 업무를 했지만 양배추 담당 판매직원이 팀장님을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한참 나이 어린 상사를 존중하는 당연함은 물론 민감한 영역의 대화에서는 '주제넘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을 덧붙일 정도로 깍듯하다. 그럼에도 매사에 비굴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시장 청과상의 판매직들은 장사를 배우기 위해 박봉과 고된 업무를 견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매일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동료들을 존중하는 모습들에서 나는 거상의 떡잎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선배 직원에게 사장님의 일화를 들었다. 이전 판매직들에게 손님들 있는 매장에서 버럭버럭 화를 내며 야단을 치는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런 사장을 견디지 못해 많이들 그만두었다는 거다. 직원의 장기근속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일화들도 있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흔한 직원들의 적당히 윤색된 사장 험담 정도로 생각했다. 내가 해고당하는 과정을 복기해 봤을 때 어쩌면 내 생각보다 많은 부분들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업무개선을 요청하는 나의 하소연에 대해 '어쩔 수 없다'에서 '불평불만이 많다'로 급격히 바뀌어 해고통보로 이어지는 과정은 다시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서사들이 적층 되어 생겨난 일일 것이다. 내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사람을 알아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단편적인 사실들과 잠깐의 인연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스스로 사람을 잘 본다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분명한 건 자신이 판매하는 제품에 진심을 다하고 동료를 존중하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일같이 정진하는 장사꾼이라면 나는 그의 제품을 구입하는데 고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거상 임상옥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 했다. '장사꾼의 믿음직한 태도'를 거상의 떡잎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이들의 장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겪은 일들은 모두 단편적인 일들에 불과하니 각 인물의 일면만을 겪은 셈이다. 거기에 더해 사람은 변하지 않기도 하지만 늘 변하기도 하는 법이니 또 어떻게들 변할지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과일과 야채를 사게 될 때 이왕이면 거상의 떡잎을 확인한 청과상에게 사고 싶다는 정도뿐이다. 믿을 수 있는 제품들을 판매할테니 말이다. 그가 이 잔인한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거상으로 성장해 가길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