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질
형용사 ‘은근하다’는 ‘야단스럽지 아니하고 꾸준하다’ ‘정취가 깊고 그윽하다’ ‘행동 따위가 함부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은밀하다’라는 의미다. 이런 그윽하고 은밀하게 고운 말이 끈기라는 말과 함께 야단스럽지 않고 꾸준하게 ‘은근과 끈기’로 붙어 다니다니 신기한 조합이다. 역시 국문학자 조윤제 선생은 대학자였다.
‘우리 민족은 아시아 대룩의 동북 지방, 산 많고 들 적은 조그마한 반도에 자리 잡아, 끊임없는 대륙 민족의 중압을 받아 가면서 살아나와서, 물질적 생활은 유족하지를 못하였고, 정신적 생활은 명랑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은근하고 끈기 있는 문학예술 내지는 생활을 형성하여 왔다. 그것의 호불호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과거의 전통이었고, 또 반 운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나왔고, 그렇게 살아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
-인문계고등국어Ⅲ/문교부/1968년 초판/조윤제(1904-1976) 수필 ‘은근과 끈기’ 중 발췌
한국인은 은근과 끈기로 버텨온 종족이다. 80년대 우스갯소리 중 한국인 시리즈가 있었다. 한, 중, 일 세나라 사람이 모여 돼지우리에 들어가 누가 더 오래 참는지 내기를 하였다. 제일 먼저 일본 사람이 하루를 못 버티고 튀어나왔다. 중국사람도 일주일을 묵묵하게 버텼지만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한국사람은 보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는데, 20일쯤 지나니 돼지가 먼저 튀어나와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다. 은근과 끈기 힘을 빗대어 은근하게 한국인의 우수성을 드러내려는 우스갯소리였다.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 기원 찾기는 단군신화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늘과 쑥만으로 동굴에서 100일 동안이나 버텨내야 하는 미션에 호랑이는 중도 포기했으나 곰은 견뎌내고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된 그 곰이 바로 웅녀다. 이 웅녀와 환웅이 낳은 아들이 단군왕검이니 단군의 후손인 한국인은 곧 웅녀 곰할머니 후손이다. 곰할머니 후손인 한국인이 곰할머니의 은근과 끈기를 닮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과학자들은 곰이 사람이 되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겠지만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단군신화를 믿고 살아온 한국인들의 가치나 생활습관 등 문화 유전자에는 분명 영향을 주었을 테니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인에게는 분명 곰할머니의 은근과 끈기 유전자가 들어 있다.
이러한 한국인이 은근과 끈기 유전자의 힘을 알게 된 계기가 있다. 전직 영업본부장 시절, 한국인의 기질, 정서에 맞는 조직관리 방법에 대해 연구했고 그때 찾아낸 방법 중에 하나가 은근과 끈기 유전자의 힘이었다. 호랑이는 포기했지만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목표가 명확했던 곰할머니는 은근과 끈기로 버텨내어 목표를 달성하였다. 은근과 끈기의 힘은 비전과 목표가 바탕이었던 것이다. 이를 깨닫고 조직원들과 명확한 비전과 목표 공유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일대일 면담 등 다양한 소통을 통해 비전을 공유하며 목표에 매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최장기간 최우수조직이라는 타이틀은 덤이었다. 그때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곰할머니 후손인 한국인들은 개인이든 조직이든 비전과 목표가 정해지면 은근과 끈기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초인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혹자는 한국인 하면 빨리빨리, 즉흥적, 냄비근성 등이 먼저 떠오르는데 무슨 은근과 끈기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모르는 소리다. 우리 역사 속에는 많은 은근과 끈기의 결과물이 존재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은 8만 1258개의 경판에 5233만 152 글자로 새겨진 현존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놀라운 점은 팔만대장경 경판 모든 글자체가 동일하고 오자는 단 158자에 불과해 불량률로 따지자면 0.0003%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은근과 끈기 말고는 설명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뿐인가? 근 500년 동안이나 매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유산과 ‘승정원일기’ 같은 위대한 기록물을 은근과 끈기 없이 어떻게 남길 수 있었겠는가?
현재를 둘러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K팝 세계도 은근과 끈기가 기본이다. 아이돌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평균 연습생 기간이 3~5년이고 많게는 7년, 10년 넘는 연습생도 있다고 한다. 곰할머니처럼 은근과 끈기 없이는 그 긴 인고의 세월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은근과 끈기 유전자가 문화강국 K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셈이다. 한국인들 속에는 빨리빨리 유전자도 있지만 분명 은근과 끈기 유전자도 들어 있다. 다만 독보적 혼종문화 창조자들답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을 잘 버무려 활용할 뿐이다. 한국인은 빨리빨리 유전자로 불을 지피고 은근과 끈기 유전자로 목표에 이르는 것이다.
힘든 시절이다. 세상은 어제처럼 오늘도 시끄럽고 먹고사는 일은 퍽퍽하다. 한국경제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끝나지 않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 하마스 간 전쟁 등으로 세계경제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다. 곰할머니가 물려준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로 존버하는 수밖에.
오늘도 늘어진 하루, 곰 할머니 잔소리가 자꾸 귓가에 윙윙거린다.
“버텨 이놈아, 사람 되고 싶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