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에 방치된 유년시절 1
"병호야 염생이 좀 끌어다 매 놔라"
처음으로 장학금을 타본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 장학금 덕분에 우리 집에 염소가 생겼다. 엄니는 그 염소를 '병호 염소'라 불렀다. 여름철이면 신선한 풀을 먹이기 위해 강가 뚝에 염소를 매어 놓았다. 아침에 매어 놓고 오후에 가보면 염소는 주변 풀을 모두 먹어 동그란 원을 만들어 놓는다. 다시 염소를 근처에 옮겨 주고 저녁에 가보면 또다시 커다란 원을 만들어 놓는다. 염소는 원만큼 풀을 먹고 원만큼 쑥쑥 컸다. 아주 어릴 적 나는 염소도 아니면서 염소처럼 밭에 매어져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젓누나’
가수 주병선이 부른 ‘칠갑산’이라는 노래 일부다. 가사의 주무대가 바로 우리 동네 근처다. 노래처럼 우리 동네는 밭이 많은 산촌이다. 우리 집 넓은 밭에도 콩을 심었다. 목수 아버지는 돈 벌러 대처 나가고 그 많은 콩밭 매기는 몽땅 엄니 몫이 되었다. 초여름부터 시작하는 콩밭 매기는 끝이 없는 일이다. 콩밭 매기의 지루함을 엄니는 이렇게 표현했다.
“징그러운 풀이란 놈, 밭 매고 뒤돌아 보면 금방 또 나와”
내가 두 살 때 동생을 낳았으니 엄니에게 그 해 여름 긴 콩밭 매기는 또 하나의 산이었다. 동생은 등에 업으면 되었지만 두 살짜리 내가 문제였다. 엄니는 궁여지책으로 밭고랑 사이에 말뚝을 박고 기저귀로 내 발목을 묶어 놓고 밭을 맸다고 한다. 엄니가 콩밭 맬 때면 나는 한 마리 염소가 된 셈이다. 처음 이 말을 듣고 서운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하지만 엄니 속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졌다. 없는 살림에 8남매 키우는 부모 마음을 어찌 내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아니 9 남매지 참.
“엄니 자식들 중에 누가 젤 이쁘고 잘 생겼어?”
“누군 누구여. 죽은 니 성이지”
“에이 일주일 만에 죽었다며 얼굴이 생각나?”
“암 생각나지. 니 성 이목구비가 번듯한 게 살았으면 한 인물 했을 겨”
철없는 아들의 우문에 울 엄니는 이런 현답을 내놓았다. 은근 내 이름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던진 우문이었는데 그런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0.1초도 안 걸렸다. ‘부모는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가슴에 확 꽂혔다.
그러니까 우리 형제는 지금처럼 8남매가 아니라 9남매였다. 형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내가 들어섰다고 한다. 나는 위에 누나와 세 살, 아래 남동생과 두 살 터울이다. 대부분 두세 살 터울인 우리 8남매 아니 9남매 기준으로 따져보니 그 기간이 20년이 넘는다. 울 엄니는 20살에 시집와 40살이 넘을 때까지 모든 청춘을 아이 낳고 기르는데 바친 셈이다. 그렇게 기른 자식들한테 효도 한 번 제대로 못 받아보고 두 분 모두 떠나신 걸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진다.
내가 그때 흙을 너무 많이 주어 먹어 지금...
9남매를 낳고 아이 둘을 업고 안고 밭을 매며 살아 냈다니 요즘 도시 부모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 또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할 팍팍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천지 분간 못하는 두 살짜리가 하루 종일 흙바닥을 기어 다녔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흙이 입 속으로 들어갔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우리 부모를 원망해 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 다만 교육적으로 본다면 결코 추천해 주고 싶지 않은 환경임은 분명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육 사각지대에 방치된 아이들도 사회구조적인 폭력의 피해자들이나 마찬가지다. 주변에 그런 아이들이 있는지 항상 살펴볼 일이다. 우주 평화를 위해서...
‘그나저나 다음 문장을 못 찾고 헤매는 이유는 그때 마구 주워 먹은 흙 때문인가? 아깝다 그때 내가 흙을 한 줌만 덜 먹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