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의 일상큐레이팅
봄은 고양이처럼 온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고, 산마루에는 녹지 않은 눈이 아직 남아 있지만, 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움직인다. 땅 밑으로 살금살금 물길을 내고, 초록을 들이민다. 겉보기에 바싹 말라 생명이 있을까 싶은 나무 등걸에서 어느새 꽃송이를 뽑아낸다.
봄은 바람으로 온다. 향기로운 바람이 대지를 훑고 지나가면, 마법처럼 꽃잎이 피어나고 새순이 솟아난다. 봄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가 보면, 어느새 봄은 저만치 가고 있다.
어제, 봄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통도사의 자장매를 보러 갔다. 분명 이번 주에 활짝 필 거라고 한 유튜버가 말했었다.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이 많아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짧은 소매에 나풀나풀한 봄옷을 입은 상춘객들로 북적였고, 기대감에 들뜬 얼굴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매년 봄이면 통도사의 홍매화를 찾았다. 올해도 ‘눈부시게 아름답네요’라고 말해주려고 왔는데, 꽃은 보이지 않고 바닥에 마른 꽃잎만 밟히고 있었다. 대신 만개한 백매화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내 마음엔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홍매화의 계절은 벌써 지나가 버린 걸까.
혹시 아직 덜 핀 것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실눈을 뜨고 살폈다. 꽃이 진 나무는 아무 말이 없고, 바닥에 깔린 붉은 꽃가루들만이 ‘나 여기 있었소’라며 증거를 댔다. 봄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허탈할 수가. 나는 관음전에 가서 따지듯 관세음보살을 째려보았다. 불상도 찢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보았다. ‘유튜브만 믿지 말고 일찍 일찍 와보든지.’ 부처님은 피식, 썩소를 날렸다.
대웅전 쪽으로 가보니 금강계단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올 때마다 막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오늘이 음력 24일 관음재일이라 사리탑 문이 열려 있었다. 신발을 벗고 조심스레 들어가 탑을 세 번 돌았다. 이런 운 좋은 날, 사진 한 장 남겨야지 싶어 휴대폰을 꺼내 찰칵. 그 순간 멀리서 한 보살님이 소리쳤다.
“거기, 사진 찍지 말라고요!” 앗, 금지된 곳이었구나. 황급히 휴대폰을 넣고 고개를 숙였다.
통도사에는 19개의 암자가 있다. 몇 년 전, 하루 만에 모두 돌아보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법당마다 아홉 번씩 절을 하며 이동했는데, 유명한 암자에는 신도들이 많았고, 방문객이 한 명도 없는 조용한 곳도 있었다.
열 곳쯤 돌았을 때부터 지치기 시작했고, 억지로 세 곳을 더 들렀다가 결국 포기했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녹초가 되었다. 그때 다녀간 곳 중 내 ‘원픽’은 극락암이었다.
통도사에 온 김에 극락암으로 향했다. 노란 산수유가 담장 너머로 반기듯 피어 있었다. 홍매화만 봄꽃이냐는 듯 노란빛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극락암 주변을 거닐다 보니 작지만 소담스러운 홍매화 한그루가 피어 있었다.
눈높이에 닿은 매화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꽃잎, 꽃술, 꽃받침, 꽃가루까지 조목조목 예뻤다. 350살이 넘은 자장매는 늘 멀리서 사진만 찍었지,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본 적은 없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눈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늘 카메라 렌즈로만 담았던 꽃을 맨눈으로 들여다보니, 내 마음에 꽃이 가만히 들어왔다. 극락암이 자리한 곳은 산중턱. 산 아래보다 더 매서운 추위를 관통하고 핀 매화가 그곳에 있었다. 꽃은 혼자 스스로 피었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부지런히 언 땅에서 흙을 들썩이고 물기를 뽑아 올렸다. 누가 보아주든 말든,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해냈다.
생각난 김에 시나 한 수 더 읊어보자.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에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젖으며 피어난 꽃들. 우리도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더 단단해지고, 아름답다. 우리는 때로 너무 빨리 지나가는 순간을 아쉬워하고 때론 오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며 망설이다.
하지만 꽃은 자신의 계절이 오면 망설임 없이 피어나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진다. 흔들리고 젖으며 피어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가 피워야 할 꽃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내년에는 더 많이 흔들리며 피었을 홍매화를 보러 극락암에 먼저 갈 것이다. 사는 동안 흔들리고 젖었지만, 언젠가 반드시 꽃 피우리라는 작은 매화의 속삭임을 들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