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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동백보다 더 뜨겁고 선명한

소정의 일상 큐레이팅

by 소정 Mar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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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홀로 산책하던 길, 활짝 핀 동백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늬 하나 없이 온통 붉은, 단정하고도 기품 있는 자태. 모가지가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꽃잎 하나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절정의 순간에 ‘툭’ 하고 소리 내어 지는 동백꽃의 운명을 떠올리며, 그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등학교 시절, 역사 수업 시간이었다. 마흔이 넘었지만 총각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았다. 주말이면 유적지를 찾아다니던 그는 수업 중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느 날,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다며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를 읊어주셨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못이 쉬어 남었읍디다."


또 어떤 날은 송창식의 '선운사'를 불러주셨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서러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https://youtu.be/Tg0zvIKuJgA?si=3SlSM9TjMuoqKIJy




그때부터 동백꽃은 내게 하나의 낭만이 되었다. 언젠가 선운사에서 그 붉은 꽃잎이 눈물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함께 볼 사람이 평생의 반려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공대를 나와 전자회사에 다니던 그는 동백꽃을 왜 보러 가는지 영문도 모르고 나를 따라나섰다.


부산에서 고창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5시간 넘게 달렸다. 선운사에 도착하자마자 대웅전은 들리지도 않고 뒤뜰 동백숲으로 향했다. 들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동백꽃은 이미 다 지고 없었다. 500년을 살아낸 나무의 거대한 둥치만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을 뿐. 바닥에는 찢어지고 썩은 꽃송이 몇 개만 나뒹굴고 있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절 앞 막걸릿집으로 들어갔다. 혹여라도 주인아주머니의 육자배기 한 소절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막걸리를 주문했다. 막걸리가 그렇게 독한 술이었나? 두 사발을 비우자 정신이 몽롱해졌고, 같이 간 남자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우리는 마치 살아 있는 동백꽃 두 송이 같았다.


우리는 인사불성으로 취해 선운사 앞 풀밭에서 정신없이 뛰어놀았다. "자기야~ 나 잡아봐라!" 서로를 쫓아다니며 깔깔거렸다. 선운사 동백꽃은 보지 못했지만, 우리 얼굴에는 붉은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서로의 향기에 취해 대낮 들판에 누워 뺨을 부비었다. 빨간 동백꽃 입술과 내 입술이 겹쳐지던 순간, 막걸리 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머릿속에선 종이 딸랑 울렸다. '아! 이 남자인가.'


그렇게 1년 후,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지금도 묻는다. "그때 선운사는 왜 간 거야?" 아무리 서정주의 시를 읊어주어도, 선운사의 낭만을 설명해 주어도, 태생부터 파워 T인 이 남자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선운사 동백꽃이 떨어진 그 자리에 우리의 사랑이 피어났다. 꽃잎보다 진한 추억이 여전히 우리를 이어주고 있다. 동백꽃을 보면 그날의 붉어진 얼굴과 막걸리 향이 떠오른다. 뜨거운 풀밭아래 막걸리에 취해 뒹굴던 정신 나간 청춘남녀. 오늘은 술도 안 마셨는데 그날 생각을 하니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선운사의 동백꽃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붉은 꽃보다 더 뜨겁고 선명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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