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은 예방할 수 있을까
한때는 미국이 연쇄살인범의 나라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내 생에 첫 논문이었던 학부 논문의 주제 선정을 앞두고 고민을 하던 시절. 학부 졸업 이후 범죄학을 이어서 공부해보기 위해 논문이라도 유사 분야로 써봐야겠다고 다짐했고, 그중 가장 흥미 있어 보이는 주제였던 '우리나라 연쇄살인범'을 택하기로 했다.
범죄학에 대한 이론적 배경도 미흡하고 연쇄살인에 대한 개념적 정의조차 모호했던 그 시절의 나는, 주제만 그럴싸하게 택해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제까지 나름의 논리로 전개해 본 핵심 가설은 '연쇄살인은 미국적 현상이다'였다.
그러다 한 책을 만났다. 지금은 대체 그때 그 책이 무슨 책이었는지 찾을 수조차 없지만, 그 책을 꿰뚫는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미국의 문화적 특이성 때문에 그로 인해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때까지 이러한 내용을 반박해서 나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인지의 그 여부 조차 알 수 없어 '그렇구나, 그렇다면 다른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라, 급하게 주제를 변경해 '연쇄살인범의 생애과정 이론*적 고찰'로 타협을 보기로 했었다.
*생애과정이론(Life-Course Theory)
'범죄생애과정이론'은 1980년대에 시작해 미국 범죄학 분야에서 관심을 받았던 이론적 틀로, 샘슨과 라웁(Sampson and Laub)에 의해 발전된 개념이다. 이 이론은 범죄자가 생애를 사는 동안을 크게 세 분류(아동-청소년-성년기)로 나누어 각 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범죄학적 이론이 다르므로, 시기마다 각각 다른 이론을 적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아동기: 사회해체이론, 사회통제이론
청소년기: 사회학습이론, 사회통제이론
성년기: 사회반응이론, 긴장이론
Sampson, R. J., & Laub, J. H. (1997). A life-course theory of cumulative disadvantage and the stability of delinquency. Developmental theories of crime and delinquency, 7, 133-161.
#1. 연쇄살인범 모두가 미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몇몇 사건과 인물들이 있다.
1990년대 화성연쇄살인사건과 2000년대 들어서 등장한 정두영,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의 연쇄살인은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연쇄살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경우 그 관심도와 노력이 무색하게 범인을 검거하지 못해 우리나라 대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지만, 이후 2000년대에 유명세를 떨쳤던 연쇄살인사건들 에서는 그 범인들을 검거해 특성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나의 학부시절 논문에서는 이러한 4명의 생애과정을 분석해 그들이 왜 연쇄살인범이 되었는가를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는 마치 나와는 동떨어진 분야인 것처럼 '연쇄살인'의 근처에는 접근조차 않았고,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연쇄살인을 주제로 무엇을 해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다른 콘텐츠의 준비를 위해 다시금 우리나라 연쇄살인범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그 과거에는 보이지 않았던 내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연쇄살인범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예를 들면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 흔히 말해 미친 연쇄살인범.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진 연쇄살인범. 혹은 그렇지 않다면, 자라오는 과정에서 여러 결함을 겪어 만들어진 연쇄살인범.
우리나라 연쇄살인범들은 이 중 마지막 분류, '자라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연쇄살인범'의 경우가 더욱 눈에 띄게 나타난다. 정두영,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중에서도 강호순을 제외한 세 연쇄살인범은 유년시절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지속적인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크고 작은 범죄에 연루되기 시작하고 그 최후가 연쇄살인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미국이나 해외에서 보이는 연쇄살인범의 종류가 위에서 설명한 세 종류에서 비교적 고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집중적으로 한 유형의 연쇄살인범이 나타난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 될 수 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연쇄살인범의 경우 그 예방이나 조치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생애과정에서 이루어진 연쇄살인범의 경우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라도 예방이 가능할 수 있다.
적어도, 이 분류의 연쇄살인범들은 '예방이 가능하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2. 그 '누군가'
지금은 국회의원이신 표창원 님의 우리나라 범죄에대한 저서 중 하나에 이런 내용이 있다.
1990년대의 유명 탈옥범 신창원과의 대면을 회고하면서, '창원'으로 이름이 같던 둘의 인생이 너무나 닮아있었음을 이야기 한 부분이 있다. 단지 표창원씨의 인생에서는 본인이 엇나가는 것을 잡아준 그 '누군가' 였던 선생님이 계셨고, 신창원에게는 그러한 '누군가'가 존재하지 못했음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2000년대의 연쇄살인범의 대부분인 정두영, 유영철, 정남규의 경우 인생의 일대기에 걸쳐, 특히 아동기, 청소년기에 그들의 삶에서 '누군가'가 있었다면, 확연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은 '연쇄살인범을 키우지 않겠다'라는 목적으로 자녀를 키우거나 학생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라나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돌보는 것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단지, 우리 사회에서 적응이 조금 힘든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신경 써주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큰 나비효과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다.
특히나 연쇄살인의 경우는 불특정 한 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이 피해자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연쇄살인범들의 슬프고 절망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의 새로운 연쇄살인범을 키워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두고 연구되고 이야기될 필요가 있지만,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거나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필요는 없다.
연쇄살인범들이 겪는 실패는 사실 많은 사람들도 겪는다. 단지 그들의 선택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그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하는 잘못에는 명확하고 정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연쇄살인은 미국과 비교했을 때, 그 빈도가 상당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빈도가 낮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범죄의 분야는 아니나, 그렇다고 자극적인 부분만이 극대화되는 것도 피해야 할 범죄의 분야라고 여겨진다.
*관련 글: 최악의 범죄, 연쇄살인 (브런치 매거진: 범인은 이안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