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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Aug 20. 2019

진짜 아홉수는 있는 걸까

모두가 지나쳤을 이십 대의 마지막

얼마 남지 않았어. 청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있듯, 밀레니얼 세대라 일컫는 우리는 이십 대의 마침표를 찍고 또 다른 시작점으로 나아가려 한다.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홉 수라는 말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내 나이 스물아홉'이라는 말만 나오면 '오~ 아홉수?'라고 말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분명 내 나이를 지나 그들도 지금의 나이가 됐을 텐데, 그런 이들에게 나는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아홉수 지독하게 겪으셨어요?"


아홉은 완벽한 숫자인 10(십) 앞에 오는 불완전한 숫자이다. 딱 떨어지지 않는 숫자 아홉은 우리 인생 역시 불완전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은하철도 999의 9는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한 마지막 여행을 위해 타는 열차가 마지막을 앞둔 성장의 통과의례 같은 시간을 강조하는 표현과도 마찬가지다.


"내년에 계란 한 판 사줄게"라며 삼십 대에 들어선 나를 놀리던 직장 상사는 내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회의실이 떠나가라 웃으며 "아홉수야? 더 큰일 났네. 망했네 망했어."라고 말했다. 그녀의 표정과 리액션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내 웃음을 멈추고 "조심해, 너"라고 반응하던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도대체 그녀의 아홉수는 어떻게 지나갔길래 내 아홉수에 그런 격한 반응을 보인 걸까.


장을 보고 계란 한 판을 품 안에 꼭 안고 돌아왔다. 부주의함의 표본이라 불리는 난 역시 이동하다 계란 한 개를 떨어뜨려 깨뜨렸다. 딱 한 자리가 비어버린 그 공간이 너무 애매해 보였다. 계란이 깨지고 균형도 깨져버렸다. 선배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 걸 두고 아홉수라고 말하는 건지 접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살갗을 스쳐 지나친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계란인데, 그말을 듣고 나선 매끄러운 표면적이 꺼끌거리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아홉수가 된 올해부터 새로운 일이 연달아 터진다. 인생은 내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 일정 시간 경력을 쌓고 더 나은 회사로 점프 업하고 싶었던 나의 스물여덟 작은 바람은 회사 팀원들을 만나며 홀연히 사라졌다. 아홉수에 결혼하면 큰일 난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고 결국 올해 결혼을 해 버렸다.


한 달 전까지도 이게 지독한 아홉수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과 싸웠다. 그렇게나 오래 연애를 했지만 역시 같은 둥지 아래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궁리해 나가는 '삶'이란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들었다. 그렇게 서로가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어느 순간 관점을 달리해보기로 결심했다. 30년 동안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각자를 받아들이고 잘할 수 있는 건 각자의 몫으로 가져가기로 자연스럽게 문서 없이도 공동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는 관계에서 오는 회의감 때문에, 비자발적으로는 인턴과 계약직이라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총 여섯 번의 퇴사를 겪었다. 타인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나의 퇴사를 습관으로 치부했다. 그저 결과만이 중요한 우리 사회에서 실패자로 낙인찍혔다. 그렇게 나는 습관성 퇴사자가 되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여러 곳으로 한 눈 팔아봤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생판 경험한 적 없었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과거에 어떤 길을 걸어왔든 현재의 내가 너무 중요한 지금이다.


책임질 것들이 많아지는, 서른


십 년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듯 시간의 변화에 따른 두려움을 표현한 게 아홉수라 생각한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갈 땐 두려움보다 청춘에 대한 설렘이 큰 편이다. 반대로 서른은 책임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어른이 된다는 의미가 짙다. 혼자 사는 이들은 스스로 나를 길러야 하고, 새로운 가족에 편입된 사람들은 그들과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적응해 나가야 한다. 어떤 삶의 형태든 책임과 의무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독 스물아홉을 진짜 아홉수라 칭하는 것이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13년의 연애를 지속한 우리 역시 시기 별로 대화 주제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는 “우리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까?”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면, 이십 대의 우리는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의 질문으로 변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른을 맞딱들이기 직전의 우리 부부는 “이렇게 계속 원하는 걸 할 수 있을까?”로 대화의 주제가 변했다. 다음 주에는 또 어떤 주제로 대화할지, 상상할 수 없지만 딱 하나, 또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와 나눌 수 있을지 기대된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요즘 좀 많이 힘들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일들을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한계에 도달하면 어떤 선택을 할지 잘 모르겠다. 한계를 버텨서 임계점에 도달해야 질적인 전환이 일어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거기까지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된다.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은 극도로 나의 긴장감을 높이고, 그 고무줄을 끊어내느냐 버텨내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능력에 달려있다.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에 혼자 떨어진 기분, 걷다보면 목적지를 발견하겠지.


엄청나게 대단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마음이 떨리는 일, 설레는 일을 찾아 걸어가다 보면 순간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일상의 조각이 모여 반짝반짝 빛나는 내가 되는 것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지.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경험을 해 보기란 드물다. 순간의 즐거움보다는 긴장의 연속으로 매일 고단한 하루를 견뎌왔으니까. 큰 성취감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삶의 주체성이라는 사실을 서른이 되기 바로 직전에야 알아차린다.


마음 안에 다른 샘물이 터져 물줄기로 솟아 나온다. 물이 좀처럼 마르지 않아 살펴보니 그건 바로 책임감이었다. 내 삶의 모든 궤적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진 것이다. 스무 살 초반 때까지만 하더라도 성공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그 사람들이 닦아 놓은 포장도로에 편승해 걸어가려 했지만, 지금은 나의 주체성을 위하여 잡초가 많이 나 있는 비포장도로를 헤치며 달려 나가고자 한다.


인간은 무엇보다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이며, 미래를 향해 자기 자신을 던지는 일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기투적 존재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선택하는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가능성이 있는 존재 그 자체로 보는 실존주의자다. 그의 이 말의 속뜻은 인간은 세계에 던져진 존재로서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스스로 자신을 던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게 하며, 스스로 책임성을 갖게 하는 게 바로 출발점인 것이다.


힘들었을 때 읽었던 사르트르의 이 말은 신기하게도 회사를 다닐 때와 다른 차원으로 다가왔다. 아홉수는 그저 지나가는 시간일 뿐. 홀로 남겨진 상태가 돼야만 사람은 스스로를 결단할 힘이 생기는 듯하다. 결단을 했을 때 새로운 힘이 생기고 그렇게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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