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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만 존경하진 않아

소심하고도 쪼잔하여라

by 석은별 Mar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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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춥다. 찬기운만으로도 문이  다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에 불은 훤히 켜져 있다. 버튼 두 개를 눌렀는지 천장 전구 3개 불이 다 들어와 쨍하게 눈에 비친다. 잠결에 눈비벼 시계 숫자를 제대로 보니 1시 30분이다.


분명 11시 전에 잠들었다. 머리를 댄 순간 바로 잠들었던 게 분명했다.


언제 문이 열린 것인지도 모르게 내가 일어난 시간은 새벽 1시 30분.

남편의 짓이다. 뭐라고 따질 가치도 없다.


일어나 활짝 열린 발코니 샷시를 닫고 세탁실로 향하는 문도 닫았다. 보일러를 높였다. 불을 끄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안방 문을 잠갔다.


욕이 나온다.


"ㅆㅂㄱㅅㄲ!"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안방 문고리를 흔들던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따고 들어왔나 보다. 내 머리맡에서 나를 살피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잠든 척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ㅆㅂㄱㅅㄲ!"

눈 감은채 마음속으로 계속 욕을 했다.


어차피 냉전 상태다. 말하고 싶지 않고, 사과하지 않으면 받아 줄 마음도 없다. 먼저 다가가지 않으리라...



[전날 저녁]


가만히 보면 우리 부부의 갈등은 늘 주방이 배경이다.


남편이 집에 혼자 있으니 퇴근하는 길에 도착 5분 전 쯤 전화를 달라고 한 게 떠올라 '곧 들어가!'라고 알렸다. 고기를 구워서 기다리겠다고 하길래 좋다고 응답했다.


아이들이 없는 집에 제법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남편은 집에 혼자 있으면 불을 다 끄고 거실 TV만 의미 없이 틀어 놓고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앉은 모습을 자주 보인다.


미리 연락했더니 남편은 고기를 굽고 있다. 나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세탁기를 돌리기로 했다. 건조대에 걸린 빨래를 걷고, 세탁기에 색 있는 빨래를 넣어 돌리고 나왔다. 문득 낮에 아들이 친구들과 잠시 놀았다는 말이 떠올라 물걸레 청소포로 바닥닦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손 발을 씻고 나와서 주방으로 갔는데


"숟가락 좀 놓지. 내가 다 차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작정이냐!"라고 한마디 한다.


"나도 들어오자마자 빨래 걷고 돌리고 바닥도 다 밀었거든?!"


"......"


숟가락을 챙겨 놓고 밥을 퍼던 중 갑자기 기분이 상한다. 밥을 같이 먹다가는 체할 것 같아서 먼저 먹으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정하고 남편과 합의한 규칙 중 하나가 내 감정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밥을 같이 먹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남편과 저녁밥을 먹다가 오고 가는 대화에 체기가 생기면 밤에 늘 고생했던 게 반복되어서 정한 규칙이다.


"먼저 먹어! 난 있다가 먹을 거야."


"혼자 먹을 것 같았으면 미리 먹었지!"


"......"


책상에 앉아 아무 책이나 꺼내 들었다. 곧 아들도 집에 도착했다.


"너 인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늦게 들어오고! 일찍 일찍 다니고 밥때가 되면 알아서 들어와야지!"라며 남편이 아들을 야단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랑 사이가 안 좋으면 괜히 애들을 끌어들이는 패턴 때문에 여러 번 옥신각신 했지만 남편의 무기는 늘 아이들이다.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면 될 것을 늘 아이들을 돌아가며 건드린다. 이 습관은 시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임을 스스로가 말했는데 화가 나면 똑같이 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기분 좋게 들어왔던 아들이 아빠의 반응에

"아까 애들 데려다주면서 8시까지 들어온다고 말했잖아!"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이 방에 들어와서 나를 보더니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것 같다. 남편이 밥을 다 먹은 것 같아서 아들과 함께 고기를 먹으러 주방에 갔다. 그렇게 둘이서 도란도란 밥을 먹고 있는데 가족 단톡방이 울린다.


"누가 내 얘기하냐?"라는 이모티콘인데 남편이 보낸 것이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으니 "나는 유령입니까!"라고 또다시 보낸다.


기숙사에 있는 딸이 이 상황을 모르니 "뭐 해?"라는 이모티콘을 보낸다.


나랑 아들이 들리도록 "또 지들끼리 속닥속닥 친한 척하는 것 봐라. 내만 빼고!"라고 한다.


저 망상이 또 시작이구나 싶어 대꾸도 안 한다.

이게 전부다.


잘못이 있다면 남편이 숟가락 놓으라는 짜증에 나도 짜증으로 반응했던 것과 들어오자마자 빨래 널고 바닥 닦는 걸 남편이 보지 못할 정도로 사부작히 해버린 것. 손과 발이 빨라서 내가 하는 양을 남들은 잘 못 쳐낸다는 것을 아는데 남편 역시 자기가 보지 못했으니 난 들어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어쨌거나 피곤함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렇게 따로 밥 먹고 잠들었던 그날 밤에 샷시와 발코니 문을 열고, 불을 훤하게 켜 놓았던 게다.

새! 벽! 에!!!


저녁에 전날 새벽에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바로 따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말 안 하고 지내는 게 더 편한 사이가 된다는 것. 어쩌면 수다쟁이 남편과 나 사이에 큰 벌일지도 모른다. 아무 일 없단 듯이 슬쩍 넘어가려는 남편과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받아 줄 마음 없는 나는 그렇게 이틀을 냉전 상태로 보냈다.


남편은 괜히 아들 이름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부른다. 아들은 나보다 더 냉정하게 대한다.

남편은 굴하지 않고 나가면 나간다고 들어오면 들어온다고 한결같이 인사하고 밥 먹자, 채널 뭐 볼래 등등을 물으며 일상대화를 허공에 대고 나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데 혼자 묻고 대답하는 걸 보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멋쩍으면 제대로 말을 하던가!"

"내가 뭘?"

"엊그제 새벽에... 도대체 왜 그런 거임? 또라이야?"

"나만 빼놓고 니들끼리 속닥속닥 거리잖아. 나만의 소심한 복수지!"

"예, 예, 소심한 복수. 아주 가소롭고도 소심했습니다!"


남편 엉덩이를 무릎으로 정조준해서 올려쳤다.


'악!'


이렇게 풀린다. 이렇게 풀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풀린다.

아들은 나와 달리 하루 더 냉전으로 있더니 "아빠가 엄마랑 사이 안 좋으면 나한테까지 시비 터는 거 진짜 짜증 나!"라고 말하며 남편의 사과를 받아냈다. "아빠가 생각이 짧았네. 미안하다."




나와 남편의 갈등은 대부분 장난으로 풀린다. 진지한 대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 멋쩍게 넘어가길 바란다. 그러나 딸이나 아들은 아빠의 그런 태도를 가장 미워한다. 자기감정에만 치우쳐서 하는 행동이라며 기분 나쁘면 버럭 하다가 미안해지면 장난으로 푸는 방식이 싫다고 여러 번 말했다. 아이들은 남편의 이런 구렁이 담 넘는 화해는 나 때문에 습관이 된 거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아이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편을 바꾸기에는 어렵다. 아니 안된다. 자기 스스로 어떻게 존경받아야 되는지, 어른스럽게 사과를 건네는지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쉰이 넘어 내일모레면 곧 환갑이 되는 남편의 행동은 종종 귀엽거나 우스울 때가 많다.

예쁘게 포장하면 사랑스럽다. 밉게 말하면 철딱서니 없는 독불장군이다.


그런 남편을 존경하지는 못하겠다. 대신 아이들 아빠로서 내 남편으로서는 사랑한다.


바람 쌩쌩 들어오게 하고 불 환하게 켜 놓는 모습에는 괘씸해서 십 원짜리 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게 자기 나름대로의 소심한 복수라고 말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초등아이다. 어쩌겠나. 나도 때로는 그 사람 앞에서는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겠나 싶다. 그게 우리 방식의 사랑이다.

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가소롭고도 사소하고도 소심한 복수를 하는 남자에게 존경심은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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