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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이다 Mar 11. 2022

버스 정류장에 깃든 적요

그림에세이(3)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버스 도착시간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깜빡했다. 방금 버스가 떠났던 모양인지 정류장은 비어있다. 정류장 곁길을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방금 떠난 버스에 실려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어쩐 일인지 오늘 아침은 목을 앞뒤로 까딱이며 부산스럽게 보도블록을 쪼고 다니는 비둘기 무리마저 보이지 않는다. 방금 떠난 버스 안의 누군가가 새우깡으로 그들을 유인해간 것일까. 


정류장 바로 뒤로 나란히 서 있는 노래방, 반영구화장숍, 부동산, 세탁소 가게들 또한 아직 영업 전이다. 붉은 루즈를 과하게 바른 아줌마의 입술이 벙긋거리듯 수다스럽게 번쩍대는 가게 간판도 껴져 있다. 늘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부산스러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완벽한 적요의 순간. 그래도 이런 적요함도 10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10분 이내면 다음 버스가 당도할 것이고, 당도한 버스 안에선 우르르 승객들이 쏟아져 내릴 것이고, 아마도 그러기 전에 곧 당도할 버스를 타기 위해 또 다른 승객들이 정류장으로 속속 몰려들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버스 정류장에 깃든 낯선 적요는 금방 깨어질 것이 예견된 초보 묵언 수행자의 짧은 침묵의 순간 같다고 할까. 


정류장 지붕 차양막에 초록빛으로 굴절된 햇살 하나가 몸을 비스듬히 늘인 채 회색빛 플라스틱 벤치에 반쯤 걸터 앉아있다. 걸터앉은 햇살 위로 엉덩이를 살짝 붙이고 앉아본다. 벤치 자리 중에서 그즈음이 가장 따뜻해 보여서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엉덩이를 벤치에 걸치자마자 순간적으로 살갗으로 파고도는 차가움에 엉덩이가 화들짝 놀라 들썩인다. 이른 아침의 햇살은 환하기만 할 뿐, 플라스틱 벤치를 데울 만큼 아직은 열기가 없나 보다. 벤치 아래 내 발치 주변에는 잘게 찢어진 과자 껍질들이 작은 회오리 바람을 따라 맴을 돌고 있다. 저들끼리 꼭 무슨 놀이를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도시 바람에도 어떤 정령이 깃들어 있어서, 이런 적요의 순간에 찾아와 개구지게 노닐고 있는 듯하다. 


버스가 언제 오려나. 옷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버스어플을 작동시켜 버스 도착시간을 알아본다. 5번째 전 정류소, 6분 30초 후 도착. 아직도 한참 기다려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궁금하지도 않는 메일을 열어보고 괜한 가십거리 뉴스를 쫓아다닌다. 머릿속에 날파리가 윙윙대기 시작한다. 한번 손에 쥔 스마트폰은 주머니 속으로 쉽사리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에 깃든 적요는 금방 사라진다. 누군가 오기도 전에 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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