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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이다 Apr 08. 2022

도서관 창가 목련나무

그림에세이(8)

어느덧 더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장으로 곧장 향하던 눈길이 글자까지 미처 가닿기 전에 자꾸만 풀어진다. 나른하긴 하지만 딱히 졸린 것도 아닌데, 마치 렌즈 조리개가 고장을 일으킨 것처럼 눈의 초점이 자꾸만 풀어진다. 눈빛은 퀭하고, 입술을 뾰로통하게 나와 있고, 고개도 몸도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 밑줄을 그으려고 쥐고 있던 오른손의 색연필도 금방이라도 책장에 떨어질듯 손가락 끝에 걸려있다. 책 귀퉁이를 받치고 있던 왼손도 느슨해져 마치 계란이라도 쥐고 있는 냥 둥그렇게 말려있다. 책상 앞에 꼿꼿하게 세워 앉았던 등줄기도 느슨해져 구부정하게 말려있다. 


이럴 땐 온몸의 관절이 뚜두둑 제대로 풀어지도록 기지개라도 활짝 펴고 싶지만, 숨소리마저 절제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마저도 포기한다. 이제 책장에만 눈을 두는 게 아주 지겨워진 것이다. 책 속의 사람들이 어떤 심각한 위기를 겪더라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니 방관자의 자세로 책과 마주하고 있다. 몸은 책상에 엎드려버리고 싶을 만큼 노곤하지만, 마음은 책상에 엎드리고 싶을 만큼 몽롱하지 않다. 그렇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만큼 기운 있는 상태는 아니어서 자꾸만 축축 쳐지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슬그머니 받쳐둔다. 그리곤 상체를 외틀어 고개가 왼편 창가로 향하게 해놓는다. 


얼룩 가득한 도서관 창 너머엔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 따라 쓸려가기라도 하는 듯, 조금 전까지 눈으로 훑었던 책장의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듯 아득해진다. 텅 비어 아득해지는 머릿속으로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어온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창 바로 앞에 서 있는 하얀 목련나무 꽃봉오리들이 일제히 바람 따라 파르르 흔들리며 하얀 나비의 날갯짓을 한다. 온 가지마다 빼곡히 앉아있는 수천 마리의 하얀 나비 떼가 파닥파닥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듯싶더니, 문득 목련나무도 나비 떼의 날갯짓 따라 함께 떠오르는 듯하다. 떠올라 얼룩 가득한 창 너머로 도서관 안 풍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도서관 창가, 늘 같은 자리에 붙박이로 서 있는 목련나무가 날마다 들여다보는 책 페이지가 네모진 창문 너머 내가 앉아있는 자리라도 되는 듯이, 나도 목련나무를 오래도록 찬찬히 바라본다. 내가 방금까지 읽고 있던 책 속의 사람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듯이. 


나는 책장을 다시 펼친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는다. 머리를 받치고 있던 오른손을 거두고 책상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고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색연필을 잡고서 책장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윽고 책 속의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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