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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l 21. 2024

배고픈 건 역시 슬픈 일이지

니체였던가. '자유란 자기 책임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사실, 누구의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무슨 선택을 하든 결과를 기꺼이 책임지겠다는 의지! 그러니까 내가 고른 메뉴가 맛이 있든 맛이 없든 밥값은 반드시 내야 한다는 그런 말인 거다. 메뉴 선택권이라는 자유를 누렸으니, 밥값으로 책임을 다하는, 그런 게 세상의 이치라는 의미.

고등학교 점심시간의 흔한 대화는 "와, 오늘 급식 뭐야?"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기껏 멋을 내봤자 "오늘 급식 진짜 별론데 분식집 가서 다른 거 먹을래?" 정도였을까. 대학생이 되니 달라졌다. 선택지가 그야말로 무한대. 김밥천국, 학식, 짬뽕, 롯데리아, 빵, 떡볶이 등등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메뉴를 내 의지로 고를 수 있었고, 심지어 수업에 들어갈지 말지도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었다. 역시 어른의 삶이란. 어른이 된다는 건 무한한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것임을 대학 생활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시간과 돈이라는 한정된 자원이 선택지에 엄청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자유는 깃털처럼 가볍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묵직한 쇳덩이를 감당할 '갑빠'가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거였다.


19살 수능을 치고 오빠가 다니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됐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두 살 터울 오빠와 20대를 함께 보내고 싶어요' 같은 소망 따윈 품어본 적도 없었다. 오빠와 대학생활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아무 계획도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오빠와 같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대참사가 내 인생에 벌어져 버린 거였다. 입학과 동시에 나는 기숙사에 입소했다. 아버지와 지내던 집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가 걸렸고, 치열한 기숙사 입소 과정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기뻐했었다. 기숙사라는 위대한 시스템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1학년 성적이 '매우' 좋아야 했다. 입학 때는 수능성적을 봤지만, 2학년이 되면 1학년 성적을 기준으로 입소가 결정되는 시스템. 당연한 얘기지만 1학년 내 성적은 좋지 않았다. 좋은 성적을 받을 만한 정신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숙취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수업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기숙사로 들어가려면 술판이 벌어져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이건 마치 지뢰밭 같은 귀갓길이랄까. 밟지 않으면 건널 수 없었다. 좀 더 솔직히 덧붙이자면, 지뢰를 찾아다녔다. 이런저런 지뢰를 꼭꼭 밟고 너덜너덜해진 후에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물론 맨 정신에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기숙사, 그곳에는 친구들이 모여 살았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도 신나는데 술도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흥이 났겠나. 깊은 산속 옹달샘을 만들 듯 우리는 술을 사다 날랐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옹달샘을 누가 먹겠나, 우리가 먹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동요는 동요일 뿐. 우리는 기껏 만든 옹달샘을 텅텅 비우고 토끼처럼 눈이 빠알개진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돌고 돌아 다시 니체의 말을 떠올려 볼 타이밍인 것 같다. 자유란 자기 책임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 자유를 실컷 누리고 성적을 망쳤으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다.


기꺼이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2학년 1학기부터는 통학을 시작했다. 버스 환승은 한 번, 편도로 2시간 여가 걸리는 길. 9시 수업이면 집에서 6시엔 나서야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학교에 다녔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나는 21세기에 살아서 버스도 탈 수 있는데, 이렇게 산 넘고 물 건너 학교를 다니는 원시적인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오빠는 학교 앞 원룸에서 자취를 하는 중이었다. 오빠 역시 1학년 때는 기숙사에 살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으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중이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에 오빠는 자취를, 나는 통학을 택했던 것. 후훗. 한 핏줄이라 그런 건지, 남매의 유전자에는 자유 환장 세포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통학을 하며 2학년 1학기를 보냈고, 학기가 끝나갈 무렵엔 '등하교에 5시간을 쓰느니 자취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현실적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집에는 낮이고 밤이고 술을 퍼마시는 아버지가 계셨기에 집을 떠나고도 싶었다. 그럼에도 쉽게 결심할 수 없었던 건, 무서워서였다. 오빠는 곧 군에 입대해야 했고, 난생처음 혼자 살게 되는 게 21살 그때에는 그렇게나 겁이 났었다. 그 무렵, 오빠가 내게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내 방에서 자취 체험 해볼래?"

오빠의 제안은 이랬다. 오빠가 입대한 이후, 여름 방학 동안 오빠의 자취방에서 '공짜'로 살아본 후 자취를 할지 말지를 결정해 보라는 거였다. 방 계약 당시에 낸 보증금이 있으니 여름방학 끝날 때까지 두 달 여를 살아보고, 그동안의 월세는 이미 내둔 보증금에서 제하면 된다는 얘기. 월세 걱정 없는 자취 체험이라니. 귀가 팔랑댈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맨 입으로 이런 달콤한 제안을 해 올리가... 없었다. 역시나. 오빠가 내둔 보증금을 쓰는 대신 오빠는 방 정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입대 전 놀 시간도 부족한데 집 정리를 하는 게 너무 귀찮다고, 부피가 큰 각종 가구는 어차피 옵션이니 그대로 두면 되고 자질구레한 쓰레기 정도만 정리해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 흠, 나는 하고 싶던 자취를 해보고, 오빠는 하기 싫은 정리를 해결하고. 서로 필요조건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랄까? 거절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이쯤이면 고고. 협상 타결. 탕탕-






오빠의 제안 덕에 아르바이트도 계속할 수 있었다. 오후 4시부터였나. 수업 후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자취를 하게 된 덕분에 방학 중에도 이어갈 수 있었다. 예정대로 오빠는 입대를 하고, 나는 오빠의 방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오빠가 없다는 사실에 하루이틀쯤은 슬퍼했던 것도 같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나는 빠르게 자취 생활에 적응해 갔다. 통학 시간이 없어지니 하루가 무지하게 길었고, 무섭지도 않았다. 밤늦게까지 방에서 뒹굴며 영화를 보다가 느지막이 일어나 4시에 아르바이트를 가는, 평화가 철철 넘쳐흐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분명 그랬다.


그 평화가 깨진 건, 뜨거운 여름날 아침. 누군가가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면서부터였다. 비몽사몽. 왜 문을 두드리지 생각했고, 곧바로 이 집에 벨이 없음도 떠올랐다. 벨이 있든 없든 상관없을 만큼 방문객도 없었다. 그런 집에 누군가 예고도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다니. 무서웠다.

쾅쾅-, 쾅쾅-

누구지?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나는, 집요하리만큼 오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예 나가보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문 너머 상대에게 '여자'가 혼자 이 집에 머무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우편물 등이 왔다면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리라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듯 조용히 웅크린 채 문 너머의 누군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비슷한 오전시간에 또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르바이트 동료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아침에 문을 두드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건네자, 그는 종교의 포교활동일 수 있다고 말했었다. 아아, 그놈의 조상 제사. 여름방학 중인 인적 드문 대학가에서 꾸준히 포교활동을 펼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늘 한점 없는 뜨거운 길에서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말을 걸어왔다. 인적이 드문 상황이니, 사람이 나타나면 더 열성적이 되는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갈 때마다 그들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저기요-"

여기저기서 휙휙. 그들은 수가 많았다. 나를 향해 몰려오는 그들 때문에 한낮 길거리에 나서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랄까. 하 참, 이놈의 인기란. 멘트도 뻔했다. "눈이 맑으시네요", "길 좀 물으려는데요", "마음 공부하는 사람인데요" 등등. 동료의 말에 따르면, 길에서 별 소득이 없던 그들이 새롭게 찾은 방법이 집을 방문하는 거라고 했다. 맨 옥상층부터 딩동-. "누구세요?" 물어보면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혹은 "이 집에 영험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등등의 레퍼토리로 말을 건넨다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꺄르르 웃었더랬다.

"아니, 원룸촌이 우물이야? 지나가는 과객이 온데 물 좀 주세요- 하는 시대도 아니고, 그런다고 누가 문을 열어줘?"

웃으면서 다짐도 했었다. 누가 문을 두드린다 해도 절대로 열어주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굳게 다짐했던 그대로 행동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웅크린 채 문밖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때 "○○학생, ○○학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이건 분명 오빠 이름이었다. 우체부 아저씨인가? 잘못 들었나, 하며 고민하던 찰나, 다시 한번 분명히 "○○학생"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쯤 되면 못 들은 척 하기가 애매했다. 문 너머 상대가 포교활동을 펼치는 중이라면 없는 척해도 될 것 같았지만, 입대한 오빠를 찾아온 누군가라면 용건이라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어, 잠시만요!" 외치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버지 나이 즈음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서 계셨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봐도 확실히 우체부는 아닌 듯했다. 그 아저씨 역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계셨다. 아저씨의 당황도 이해는 됐다. "○○학생"하고 남자 이름을 불렀는데, 여자로 보이는 생명체가 문을 열고 나온 데다 따라 나오는 사람도 없었으니, 머뭇머뭇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누구.... 세요?"


상대는 이 원룸 건물의 주인. 위대하신 주인님, 훌륭하신 건물주님이셨다. 그리고 건물주님이 해주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아, 친족 사기의 피해자가 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상큼한 내 혈육. 오빠의 말을 의심 없이 믿은 어리석은 내가 문제였다. 아아, 이 멍청한 것.

오빠는 '이미' 여러 달의 방세가 밀려있는 상태였다. 호언장담하며 말했던 그놈의 보증금도 월세 대신으로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보증금을 제하고도 여러 달 월세가 입금되지 않았기에 주인님은 '직접 방문 독촉'이라는 수단을 택하신 것이었다. "네?", "네에?", "헐"만 반복하는 나에게 주인님은 최후통첩을 던지고 몸을 돌리셨다.

"밀린 방세를 모두 내고, 2학기 시작 전에 방을 비워줘요. 그래야 다른 사람한테 방을 놓죠."

새 입주자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엔,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그래, 저분이 뭔 죄가 있겠어. 오죽하면 이 날씨에 여기까지 오셨겠어. 밀린 방세를 대충 계산해 봤고, 여름 방학을 모두 쏟아부으면 얼추 갚을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는 때마침 막 2호점을 오픈한 상태였고, 사장님과 상의 후 그곳으로 2차 출근을 하기로 결정했다. 2학기를 좀 넉넉하게 보내려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한여름밤의 꿈이란 그런 거니까. 꿈을 꿀 땐 신기루 속에서 잠시 잠깐 행복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황망히 사라지는 것. 4시부터 9시 1호점에서 일을 하고 9시부터 2호점으로 출근해 서빙을 하는, 뜨거운 여름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쯤 해서 수다를 위한 질문을 던질 때가 된 것 같다.

"돈이 없어서 굶어본 적 있으신가요?"


내 경우엔 이 무렵, 처음으로 밥을 굶게 됐었다.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삶이긴 했지만 배고플 때 밥을 굶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21살 이 여름에는 돈을 아끼려 밥을 굶기를 택해야 했다. 젊음의 시간을 시급으로 바꿨고, 그렇게 모은 시급을 모조리 주인님께 드려야 했으니까. 주인님께 입금을 할 때마다 생각했던 것 같다.

'아아, 건물주가 되고 싶어. 나도 건물주가 될 테야.'

한여름밤의 꿈, 20년이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나의 아련한 꿈이여.


아르바이트 시작 시간은 오후 4시였다. 4시 즈음 출근을 하면 손님이 몰리기 전 직원들을 위한 '밥시간'이 있었고, 나는 하루 종일 밥시간만을 기다리며 지냈다. 자취를 하며 확실히 깨달은 하나는, 입으로 들어가는 게 죄다 돈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게에서 주는 건 '공짜'였다. 1,2차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 1~2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배가 고팠지만 물만 마시며 4시를 기다렸다. 요즘 핫한 '간헐적 단식'을 20여 년 전에 이미 실천한 셈. 돌아보면 신기하다. 간헐적 단식을 하면 살이 쑥쑥 빠진다던데, 이 여름을 지나면서도 살은 빠지지 않았다. 전혀.

체중 감량은 이루지 못했지만 얻은 건 있다. 이 방학을 보내며 나는 편식을 완전히 고쳤다. 배고픈 게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성인이 되어서도 김치를 포함한 야채 대부분을 즐기지 않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엔 무엇이든 다 먹을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 있었다. 야채의 식감이 질겅하다고? 김치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고? 뭔 헛소리야. 배가 불렀구먼. 그딴 걸 따지며 밥을 먹다니. 엄마가 절로 생각나기도 하는 날들이었다. 아아 엄마, 내가 드디어 김치를 먹어! 이 자랑스러운 모습을 엄마 앞에서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엄마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렇게나 훌륭히 자라서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유훗!


방에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았다. 배도 고팠지만 엄청나게 덥기도 했으니까.

"배고파", "더워"

이 말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밥값도 아껴야 하는 존재에게 에어컨은 사치였다. 출근 시간을 기다리며 방에 홀로 있을 때는 조그만 우주선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넓고 넓은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선. 지구와 교신은 끊긴 지 오래. 어쩌다 보니 우주선이 길을 잃고 태양 근처로 와버린 것 같았다.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이 우주선을 얼른 탈출해,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방에는 에어컨도 밥도 없었지만, 가게에 가면 에어컨도 있고 밥도 있었다. 방에서 쉰다기보다는 출근을 기다리는 것 같은 날들이었다. 그렇게 방학을 보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날 즈음에는 자취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방세를 낸다는 게 얼마나 큰 지출인지 몸소 체험하고 있었고, 이런 생활을 더 이어가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느껴졌다. 길에서 버리는 5시간? 월세를 내려면 그 시간만큼 서빙을 해야 하는 거였다. 이후 졸업 때까지,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통학을 했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보니, 마치 오빠 뒷담화를 한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맞다. 이 글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받은 분이 계신다면... 오오, 당신은 능력자. 개떡같이 써뒀음에도 찰떡같이 읽으신 분이라 말씀드리고 싶다. 이렇게나 길게, 나는 내 혈육에 대한 뒷담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고? 신나니까. 친오빠 뒷담화는 며칠을 쉬지 않고 쓸 수 있을 만큼 신나는 소재다. 이 세상의 모든 여동생이 그렇지 않을까. 에? 나만 그렇다고? 설마, 그럴 리가. 무려 20여 년 전의 일. 술 마실 때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며 사골 우리듯 우려먹고도 이렇게 또 글로 남겨 괴롭히는 깜찍한 여동생이라니. 후훗. 그동안 수없이 사과를 받았고 월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돌려받았음에도 또 이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남매는 그런 것 같다. 쿨함 따위 끼어들지 못하는 핫한 사이. 지나간 일을 쿨하게 넘긴다고? 에이, 그럴 수는 없지.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며 서로를 괴롭히고, 괴로워하는 상대를 보며 '지나간 일인데 뭐 괜찮아'하고 넘기다가, 또다시 같은 이야기를 꺼내며 낄낄거리는 사이. 술을 진탕 먹은 날에는 쓸데없이 진지하게 "좀 잘 살아라"하며 틱틱대는 사이. 낄낄거리고 틱틱대다가도 풀이 팍 죽은 상대를 보면 '에잇, 술이나 먹여줘야겠다' 생각하는, 희한하고 변태 같은 남매 사이. 아무튼 덕분에 밥도 굶어보고 편식도 고쳤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오빠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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