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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l 07. 2024

국민학교에 도시락 싸가신 분?

가끔, 그런 순간을 만난다. 익숙한 대상이 낯설게 보여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 점심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았을 때 딱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매일매일 세 번이나 맞이하는 끼니 중 하나. 그 정도 느낌으로 친숙한 단어였지만, 點心이라는 한자어를 보고서는 그 단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라, 이렇게 깊은 뜻이? 나는 마음에 점을 찍으며 살고 있나,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었다.


'도시락'은 점심 덕분에 찾아보게 된 또 다른 단어였다. 점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뇌의 한 부분에서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기에 검색해 봤었다. 락(樂)과 다른 어떤 한자들이 합쳐진 말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도시락은 순우리말이었다. 옛 형태는 '도슭'. 먹거리를 담는 그릇을 뜻하는 말이라고. 돗(草 풀 초)+을(접미사)+ㄱ(첨가음)으로 분석되는 단어라는 설명과 '나무나 덩굴 따위로 만든 그릇'이라는 풀이도 이어졌다.(한국문화원연합회 <월간 우리 문화>) 옆에는 삽화도 붙어 있었는데 '소쿠리'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외형이었다. 뚜껑으로 덮을 수 있는 길이 30cm 정도의 작은 소쿠리. 그 뚜껑 달린 소쿠리가 우리나라 도시락의 최초 형태였던 거다.


대낮에 일을 해야 하는 논밭과 집은 꽤 멀었고, 식사를 위해 집까지 다녀오기엔 힘도 시간도 들었으리라. 그러다 보니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음식을 싸다닐 방법을 찾았다는 설명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국에 울려 퍼졌던 한 배달업체의 광고멘트가 떠오르는 순간. 류승룡 배우님은 목이 터져라 외쳤더랬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도슭을 쌌으면 누군가는 옮겼어야 할 테니 정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배달의 민족'인 것도 맞는 설명인지도 모르겠다. 휴대용 포켓 와이파이 업체 이름이 '도시락'인 것도 문득 떠올랐다. 와우, 도슭이 도시락이 되고, 이젠 그 도시락에 밥 대신 와이파이를 담아 전 세계로 옮기다니. 익숙했던 도시락도 이젠 새롭게 보인다. 불혹은 무슨. 세상천지 온갖 게 다 신기해 보이는, 끝없이 혹혹 호기심이 생기는 그런 나이가 마흔인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도시락 수다. 수다를 위한 두 번째 질문을 던질 때가 온 것 같다.


"초등학교에서, 급식하셨나요?"


이 질문을 읽자마자, '어라, 나는 국민학교 졸업했는데?' 하는 분도 있으리라. 당황하지 마시길. 저는 그저 짐작할 뿐입니다.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기에 졸업까지 마치신 당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군요, 하고.

얼마 전, 아는 동생과의 대화에서 나이 얘기가 나왔고, 그 동생이 내게 던진 질문이 그거였다.

"초등학교 졸업했어요?"

무엇을 묻는 질문인지를 몰라 당황했었다. 초등학교는 의무교육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응"하고 대답하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 "입학할 때도 초등학교였어요?"

별생각 없이 "아니? 국민학교였지"하고 대답하며 깨달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했는지 초등학교를 졸업했는지 묻는 것으로 대략적인 나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걸.


국민학교가 초등학교가 된 건 1996년의 일이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며 교육부는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국민학교의 명칭을 변경한다"고 발표했고, 1996년 3월 1일부로 전국의 모든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국민학교'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한다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정책을 반영하는 단어였다. 반면 초등학교는 전체 교육 과정 중 어떤 단계인지를 알려주는 말이었다. 아무튼 한 명의 황국신민으로 입학했던 나는, 험난하고 어려운 6년의 교육과정을 당당히 이겨내고, 초등교육을 이수한 자만 획득할 수 있는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거였다.


이 6년을 보내며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현재의 키를 4~5학년 무렵에 이미 달성했으니, 무럭무럭 자랐다는 말이 오버는 아닌 셈. 이 폭풍 같은 성장의 시기에 열심히 싸다닌 게 도시락이었다. 엄밀히 말해, 도시락을 싸는 행위를 하는 주체는 내 어머니였고 나는 그저 열심히 '들고' 다니기만 했었다. 지금도 떠오르는 플라스틱 2단 도시락과 남색의 도시락 가방.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하얀 타원형 도시락 두 개가 위아래로 겹쳐진 형태였다. 1층은 밥 칸, 2층은 세 개의 방으로 나뉜 반찬 칸. 2층 지붕 위 옥탑방엔 젓가락과 숟가락 세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책상 한가운데에 올렸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1층 밥칸을 확인했다. 볶음밥 혹은 쌀밥, 딱 그 정도의 선택지만 가능한 '뻔한' 자리였다. 그리고 두둥, 메인디쉬를 품고 있는 2층을 확인했다. 2층. 3분의 2쯤 넓은 공간은 메인디쉬를 위한 널찍한 자리였고, 나머지 3분의 1 공간은 그마저도 둘로 쪼개진 쪽방촌이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 쪽방 식구들은 어린 시절의 내 관심을 조금도 끌지 못했다. 고정멤버라 불러도 될 만큼 변화가 없었으니까. 한 칸에는 검은 콩자반 혹은 멸치볶음이, 나머지 한 칸에는 거의 늘 김치가 들어있었다. 은박지에 곱게 싸여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큼한 냄새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김치 녀석. 이 녀석은 도시락 인생 내내 늘 문제가 됐었다. 나는 김치를 삼킬 만한 능력을 못 갖춘 꼬맹이였다. 시큼한 향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식감이었다. 익히지 않은 상태로 씹히는 굵직한 잎채소의 사각 아삭함을 나는 정말 견디지 못했다. 이빨에 그 질깃함이 닿으면 꼬맹이는 질색하기 바빴다. 으으, 으으, 하다가 퉤 뱉어버리는 게 다반사. 김치에 이어 싫은 음식 2, 3위를 다투는 것이 양파와 파였다. 한마디로,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을 뒤적대며 채소는 다 빼놓고 어묵과 고기만 집어먹는 몹쓸 꼬맹이였다.


어머니는 이 꼬맹이의 편식을 크게 탓하진 않았으나, 주변에선 모두가 입을 댔다.

'저렇게 편식하면 키 안 커.'

쳇. 말의 힘이란 역시 굉장한 것이다. 자라면서 수없이 들었던 그 말 덕분에, 나는 정말로 키가 자라지 않았다. 편식 때문 아니냐고? 노노, 고기를 그렇게나 먹었는데, 그럴 리가. 편식이 문제가 아니라 말이 가진 힘 때문이라고 나는 굳게 믿으며 살고 있다. 아무튼, 그런 편식쟁이 케어를 위해 어머니가 자주 택하셨던 메뉴가 볶음밥이었다. 1~2주에 한 번쯤은 도시락 1층에서 빠알간 케첩볶음밥을 만날 수 있었다. 온갖 재료들을 품어 안는 위대한 향신료.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든, 케첩이 젤 강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케첩의 장막 아래로 온갖 야채들을 숨기셨다. 숨기는 어머니와 찾아내는 딸. 딸은 케첩볶음밥에서 밥과 햄만 골라 먹고 야채들을 쏙 남긴 채 도시락 뚜껑을 닫았고, 그런 날들이 쌓여갈수록 어머니는 볶음밥에 들어가는 야채 크기를 점점 줄이셨다. 내 편식이 심해질수록, 어머니의 칼질 솜씨는 늘어갔다. 저학년 때엔 분명 툭툭 집어 골라낼 수 있을 크기였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야채들은 밥알만 한 크기로 작아져 갔다. 특히 양파. 녀석은 정말 밥알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작게 다져진 몰골로 밥알과 뒤섞여 있었다. 양파가 더 작게 더 작게 다져지는 그 시간 동안, 딸은 사춘기 지랄령에 완전히 빙의되어 가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야채를 먹이려는 칼질 고수 어머니와 사춘기 지랄령에 지배당한 딸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도시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었다.


4~5학년 무렵의 어느 점심시간. 지랄령은 볶음밥을 마주하고 뿔이 나 버렸다. 그렇게나 싫다고 했지만, 또 잘게 다져진 채 밥알과 얼싸 안고 있는 양파가 거슬렸다. 지랄령 녀석은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조금 떠올린 후 숟가락 안의 볶음밥을 평평하게 펼치고, 양파로 추정되는 녀석을 하나하나 젓가락으로 색출해 내기 시작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섬세한 작업으로 손가락이 마비되는 것 같았지만 지랄령은 끈기 있는 녀석이었다.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도시락 한편에는 밥알인지 양파인지 모를 녀석들이 잔뜩 솎아져 쌓였다. 이날 이 작업을 하느라 점심시간 1시간을 오롯이 다 썼다. 친구들은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내 이름을 부르기도 했겠지만, 지랄령은 굴하지 않고 양파를 골라냈다. 그리고 폴짝폴짝 집으로 돌아가, 양파들이 가득 널브러져 있는 도시락통을 싱크대에 톡 내려뒀다. 역시나 어머니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됐다. 이쯤은 이미 예상한 바. 이 정도 폭격에 흰 깃발 나부끼며 투항할 거였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싸움이었다. 사춘기 지랄령은 독립투사인 듯 맹렬히 외쳤다.

"아! 싫어! 양파 싫다고!"

 




양파를 그렇게나 다져 넣는 어머니였지만, 도시락 2층 메인은 웬만하면 내 취향으로 채워주셨던 것 같다. 제일 좋아했던 반찬이 뭐였더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두 가지. 하나는 첫 책 <만나지 못한 말들>에서 무려 한 꼭지를 할애하며 '먹고 싶다'는 타령을 했던 돼지고기케첩볶음. 퍽퍽한 돼지고기에 케첩과 설탕 등을 넣고 볶아내 새콤달콤 풍미가 넘쳐흐르던 그 음식. 이건 정말 밥도둑이었다. 자작자작 국물째 떠서 밥 위에 올리고, 국물이 밥알 사이사이 지층으로 빠알갛게 퍼져갈 때 고기와 함께 한 숟가락 가득 떠서 냠냠. 퍽퍽한 고기와 밥알이 어우러지며 쭈압쭈압 입 안에서 퍼지는 그 맛이라니.

돼지고기케첩볶음과 쌍두마차를 이뤘던 최애 반찬은 소시지케첩볶음이었다. 나는 어쩌면 케첩성애자였던 걸까. 이 소시지케첩볶음 역시 밥과 함께 먹어야 제 맛. 입 안에서 케첩의 새콤함이 퍼질 때, 소시지의 뽀득한 질감을 이빨이 씹어내는 그 순간이 정말 너무 좋았다. 물론, 양파와 피망 같은 놈들이 간혹 껴 있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골라내면 될 일. 이 향연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바로바로 분홍 소시지! 이건 밥과 함께 먹기엔 상당히 목 막히는 반찬이긴 했다. 간도 되어 있지 않은, 노란 계란옷 입은 분홍분홍한 녀석을 앙 베어 물고 밥을 먹으면 역시 2%가 부족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나 만능 향신료 케첩이 나서야 했다. 케첩을 뿌리면 웬만한 건 다 맛있어졌다. 적절히 짭짤하면서 분홍 소시지만의 풍미까지 끌어올려주는 케첩 만만세.

이 소시지를 떠올리면 한참 후 나이를 먹은 고등학생 때 마트에 갔던 기억도 떠오른다. 들어 올리기에도 묵직한 분홍소시지를 굳이 잡았던 건, 가격이 궁금해서였다. 깜짝 놀랐었다. 너무 싸서. 비엔나에 비해 너무 싼 가격 때문에 검색까지 해 봤었다. 대체 뭘로 만들어서 이렇게 싼 거야? 그렇게  알게 된 분홍이의 정체. 녀석은 물고기로 만들어진 놈이었다. 비닐에 넣는다는 점에선 소시지라 할 수 있겠지만, 원재료 함량으로 보면 어묵에 더 가까웠달까. 생선을 원재료로 해서 돼지고기를 섞고 밀가루, 전분 등도 넣어서... 사실 정체 같은 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분홍이가 돼지고기임을 주장하며 나에게 돈을 뜯어간 적도 없었으니, 어묵이든 뭐든 값이 싸니 더 훌륭하군 하면 그만이었다. 맛있으면 죄다 이해해 줄 수 있는 넓은 아량이 내겐 있었으니까. 이런 아량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식구들도 많았다. 계란말이, 돼지고기장조림, 메추리알조림, 또 또.... 


이 글을 쓰며 여러 번 침을 꼴깍 삼켰다. 침을 꼴깍대며 신이 나서 다다다다 자판을 두드렸다. 이 나이에 도시락 반찬 얘기에 이렇게나 신을 낼 수 있다니. 후훗. 역시나, 나는 좀 귀여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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