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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l 14. 2024

급식, 짜릿했던  그날의 기억

언제부터 급식을 했더라?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이든 물어보는 네이버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1998년부터 모든 초등학교에서 급식이 실시, 꾸준히 확대돼 2003년에는 전국 초중고에서 전면 시행됐단다. 학교마다 조금씩 달랐으리라. 나는 아마도 중학교 졸업 무렵 급식을 시작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어우, 이제 도시락 안 싸도 된다"하시며 싱크대 2층 저 높은 곳으로 도시락을 치워버리는 걸 옆에서 본 기억이 남아있으니까. 


이후 고등학교 1학년에 부산에서 대구로 이사를 했고, 대구의 학교에서도 급식을 했었다. 전학 직후 어머니의 암 투병이 시작됐고 그해 여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급식은 훌륭한 제도였다. 배가 고픈 건 슬픈 일이니까. 급식마저 없었다면 그 시절이 조금 더 서글프지 않았을까. 17살의 나는 참 여러 번 생각했었다. 반찬 투정 따위를 했던 어린 시절의 나란 꼬맹이, 배가 불렀었구나. 밀어낼 반찬도 투정할 사람도 이제는 없구나. 그 시절의 주린 나를 채워준 건 학교 급식이었다. 이다음 자연스럽게 이어질 문장은 '맛있게 먹었다' 같은 것이겠지만, 솔직히 맛있다고 평가하긴.... 정말 어려웠다. 그냥,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정도로 정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침도 안 먹은 성장기 여고생은 매우 배가 고팠지만, 그럼에도 맛있지는 않은 그런 급식이었고, 그렇지만 그 존재 자체로 엄청나게 소중한 급식이었다.


아무튼, 고등학생 시절 학교 한 켠에서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리실은 완공된 상태였지만, 전체 학생이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급식실은 공사 중인 그런 상황. 반마다 두 명의 급식 당번이 있었다. 일주일씩 번호순으로 돌아가며 맡았던 것 같은데, 이 당번이 되면 점심시간 10분 전쯤 스윽 일어나 조리실로 향했다. 각 반 분량의 국과 밥, 반찬들이 큰 통에 담겨 있었고 그것들을 수레 같은 것에 싣고 돌돌돌 교실로 돌아와 배식대에 세팅해 두면 1차 업무는 끝. 그리고는 종이 울리길 기다렸다. 댕댕-,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교실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줄을 섰다.


같은 반 아이들을 위해 배식을 하는 것이 2차 업무였다. 이 업무에 필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평정심이었다. 몇 명이 쏟아져 나오든 침착해야 했고, 마지막 아이에게까지 음식을 나눠줘야 했으므로 남은 아이들의 수를 세며 한 국자 한 국자 퍼담는 고도의 스킬도 필요했다. 나의 예민함도 기세등등 하늘을 찌를 시기였지만, 주변 아이들 모두가 예민한 나이였다. 그리고 어른이든 애든 먹을 것에는 더 예민해지는 법.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는 말이 괜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여자고등학교를 다니며 소위 '머리채 잡는 싸움'을 몇 차례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전부가 급식시간에 벌어졌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었나? 여고를 다니며 깨달은 건, 원수는 급식시간에 만난다는 거였다. 사이가 안 좋은 친구들이 배식을 주고받는 사이로 만나면 싸움이 벌어졌다. "왜 나만 적게 주냐", "일부러 적게 준 거 아니냐", "배식량 조절도 못하고 니가 그렇지 뭐" 등의 문장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말싸움이 벌어지면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목소리 크기와 욕설의 빈도로 대략적인 승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어? 씨발!" 정도의 추임새를 넣으며 다다다다 쉬지 않고 쏘아붙이는 쪽이 대부분 승리. 랩 경연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비트가 어디선가 쏟아져 나오듯, 다다다다다다다다 욕과 주장을 멈추지 않는 쪽이 이겼다. 상대가 기분 나쁠 포인트를 짚어내는 적확한 언어 구사력과 누가 들어도 귀에 꽂힐 만한 명확한 발음도 필요했다. 상대의 대꾸에 멈춰서도 안되고 상대가 뭐라든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는 의지도 갖춰야 했다. 역시 싸움이란, 기세가 중요한 거였다. 


몸싸움도 마찬가지. 몇 차례 목격한 바로는 무조건 '선빵'이 중요했다. 어깨를 가볍게 미는 식의 이도저도 아닌 액션은 오히려 금물. 어깨를 밀칠 거면 온 힘을 다해 밀어서 상대의 중심을 흩트리는 편이 분위기를 이끄는 데 유리해 보였다. 한쪽이 넘어지면? 주위 아이들이 선빵녀 쪽으로 다가가 "야야, 참아 참아 그만해" 정도의 액션을 더해주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키는 또 다른 무리가 "야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정도의 멘트를 곁들이면 그즈음에서 싸움이 끝날 확률이 높았다. 무림고수급의 스킬을 가진 아이도 본 적이 있다. 머리채를 휙- 낚아채면서 발길질까지 하는 엄청난 선빵. 맞아서 넘어진 아이도, 구경하는 아이들도 그저 멍해질 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례하게 끼어드는 건 무림 고수의 기분을 거스를 수 있는 일이니까. 무림 고수는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뭐? 왜?"하고 물었고, 넘어진 아이는 앉은 자세 그대로 "아, 아니"하고 대꾸를 했었다. 역시 고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거였다. 고수는 웅성웅성 거리며 몰려있는 아이들 사이를 뚫고 유유히 그곳을 벗어났었다. 우와우. 


나는? 멀찍이 떨어져 난투극을 바라보며, 굳세게 여러 번 다짐하는 아이였다. 

'아아, 배식에 더 정성을 기울여서 이런 싸움에 절대로 휘말리지 말아야지! 꼭 모두에게 비슷한 양으로 나눠주고 말겠어!' 그 누구와도 싸울 의지가 없었고, 이런 싸움에 휘말리는 것조차 싫은 그런 소심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이런 소심한 아이들이 많았던 건지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후에는 배식이 질서 정연하고 매우 빠르게 진행됐던 기억도 난다. 난리 후 한동안 선생님들의 살벌한 감시가 이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싸움에도 순기능은 있는 거였다. 





1학년 때부터 단 한 명 B와 유독 친하게 지냈었다. 당시의 나는, 감정 기복이 꽤나 심한 편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아이. 그런 이름표를 스스로에게 붙이고 나름은 사연 있는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이었기에, 그런 감정들을 별로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방방 들 땐 한없이 웃고 다니다가, 우울해지면 하루 종일 엎드려 있기도 했었다. 한마디로 그냥, 또라이였다. 그리고 B 또한 나름의 사연으로 감정 기복이 심했다. B의 짜증과 눈물과 웃음과 화는, 언제든 나보다 월등히 셌다. 나의 솟구치는 감정들도, B의 기세와 마주하면 오히려 잔잔해졌다.

"왜? 왜? 무슨 일 있어?"

이런 말을 자주 건네는 사이였다. 일기예보 확인하듯, B의 기분을 확인한 후에야 어떻게 대할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B는 글짓기 대회에서 자주 상을 받는 아이였다. 수상작들과 B가 인터넷에 연재하던 소설들을 읽으며 나는 여러 번 찐으로 감탄했다. 이런 게 재능이구나,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B의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던 온갖 책들, B는 이런저런 작가와 작품들도 줄줄 꿰고 있었다. 나와는 다른 존재. 어린 나이에 확고한 꿈과 방향이 있는 B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멋있는 B를 동경했다. 그녀의 모든 변화무쌍한 감정들은 '예술가의 성향'일뿐.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절대 갖지 못할 비범한 재능을 가진 그녀는 얼마든지 괴팍해도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평범한 나는 B의 비범한 성격을 참아내야 한다고 생각도 했다. B의 재능이 부러웠던 어린 날의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B 곁에 머물며 B의 재능을 닮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사이였다. 멀리서 봤을 때는 무척이나 친한 사이. 나의 일방적인 동경과 B의 무시가 적절히 어우러진, 흔한 여고생들의 친구 사이. 1학년 때에는 거의 매일 붙어 다녔으나 2학년이 되면서 다른 반이 됐었다. 큰 상관은 없었다. 수업을 따로 듣는다 한들, 우리의 우정이 깨질 리는 없었으니까. 조금 귀찮아질 뿐이었다. 학교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긴 휴식시간인 점심을 함께 보내려면, 반을 이동해 밥을 먹어야 했으니까. 나는, 내가 속한 반에서 급식을 받아서는 그 식판을 들고 B의 반으로 옮겨 가 점심을 함께 먹기를 택했다.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지금은 들지만, 당시는 무려 낭랑 18세. 뭣이 중허겠나. 우정이 제일이지. 귀찮은 거? 그런 게 위대한 우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친구였고, 같이 있는 시간과 친밀도가 비례한다고 굳게 믿던 나이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학교에는 많았다. 점심시간 복도는 명절날 버스 터미널과 비슷했다. 배식을 위한 줄이 큰 물줄기처럼 반마다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굵은 물줄기 사이사이 공간에 다른 반으로 이동하는 작은 흐름들이 뒤엉켜 흘렀다. 물처럼 흐르는 수다 소리, 까르르 웃음, 그런 것이 낭만이 넘치는 여고의 일상적인 점심 모습이었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될 즈음, 나는 점차 정신을 차려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내 세계에서 공부라는 극악무도한 녀석은 완전히 소멸된 상태였지만, 어느 날 시험 등수를 보고는 '현타'가 왔다. 반의 전체 인원 수와 내 등수가 크게 차이가 나질 않았다. '어라,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꽤나 현실감 있게 들었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조금씩 실천에 옮겨가고 있었다. 안 하던 공부를 하려는 나와 B 사이에는 소소한 다툼이 잦아졌다.

"오늘 노래방 갈래?"

"다음주가 시험인데?"

대략 이런 식이었다. 동경하는 B의 제안을 내가 거절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어쩔 수 없이 연거푸 거절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거절들이 이어지면서 나는 꽤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B의 성격을 건드렸으니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았달까. B가 나를 외면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가졌던 걸 보면, 확실히 건강한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B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전학과 어머니의 부재 등 혼자 버티기엔 버거운 삶의 풍파들이 몰아쳤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B에게 나는 기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B를 따르면 나도 좀 강해질 것이라 생각했었던 건지도. 이렇게나 길게 부연설명을 이어갈 만큼 B와 나의 관계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 무렵의 어느 점심시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급식을 받아 식판을 들고 B의 반으로 갔었다. B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자리를 옮겼나? 휘휘- 교실을 둘러보던 내 눈에 들어온 B의 모습. 교실 앞쪽에서 다른 무리에 섞여 둥그렇게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차분히 생각해 볼 만한 눈치 같은 건 내게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왜 저기 있지? 식판을 든 상태 그대로 B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같이 밥을 먹던 무리의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봤고,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B는 수저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밥을 먹으며 했던 말이 "너네 반 가서 먹어"였던가? 문장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분위기만은 선명히 떠오른다. B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와, 정말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밝디 밝은 교실, 왁자하고 소란한 교실에서, 어두운 핀 조명이 나만 따라다니는 기분이랄까? B의 주변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어찌할 바 몰라하며 나를 흘끔흘끔 봤고, B는 평온을 가장하며 눈을 내리깐 채 멈추지 않고 밥을 먹었다. 나는? 그 분위기를 감당할 만한 에너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에 어버버 거리면서 식판을 든 자세 그대로 돌아서 교실을 빠져나왔다. 격한 이동으로 식판 안 국물은 찰랑찰랑 제 자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주책없는 내 눈물도 넘실넘실 눈가로 넘쳐났다. 안돼, 울면 지는 거야. 꼬꼬마 시기든 고딩 때든 지켜내야 할 싸움의 규칙. 우는 건 약한 거고, 울면 지는 거였다.


복도를 지나 반으로 돌아왔다. 배식이 마무리되고 아이들의 이동도 모두 끝이 난 복도는 명절 연휴 거리처럼 조용했다. 다들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가 밥을 먹는데,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우리 반 교실 뒷문으로 빼꼼 내 자리를 봤지만, 당연하게도 다른 친구가 이미 앉아 있었다. 학기 시작부터 꾸준히 B의 반으로 가서 밥을 먹어 왔기에, 점심시간마다 다른 친구가 내 자리를 이용한다는 걸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터였다. 점심식사가 한창인 이때,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다가가 "내 자리인데 비켜줄래?" 할 수도 없는 일. 어찌하나 고민하던 그때 떠오른 장소가 바로 옥상 입구였다. 이 건물의 맨꼭대기 층. 학교 옥상문은 당연한 듯 늘 잠겨 있었기에 옥상 출입구까지 올라오는 아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가끔 눈물이 난다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종종 찾았던 곳. 역시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 맨 꼭대기 층계에 식판을 내려놨다. 그리고 나도 식판 옆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인지하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뿌에엥. 팔에 얼굴을 묻고 세상 슬프게 꺽꺽 울었다. 다들 무리에 껴 있는데 나만 혼자야. 엉엉. 저렇게나 햇볕이 쏟아지는데 내 인생은 왜 이래. 학교에서는 울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았었다. 나 시크한 사람이야, 나만의 특별한 다크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 어린 여고생들, 너희는 나의 시크함을 이해하지 못해. 그런 콘셉트로 중무장했던 사춘기 여고생은, 예상치 못한 B의 공격에 빈틈을 찔린 채 훌쩍훌쩍 눈물을 짜냈다.


흑,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이렇게 안 비참해지잖아. 점심시간에 오지 마. 이 말 한마디면 다 알아들었을 텐데. 미리 말만 해줬어도 나도 다른 애랑 먹었지. 나쁜 년아. 노래방 같이 안 갔다고 이러는 거야? 아니, 왜 공부를 안 해. 공부하는 게 나빠? 어? 내가 다시는 너랑 밥 먹나 봐라.


마음은 분명, 비련의 여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잔뜩 상처받고 웅크리고 비탄에 잠긴 채였다. 하지만 비련의 여주인공을 감당하기에 내 몸은 너무 건강했달까. 슬프고 화가 나도, 그건 그거고 배는 고팠다. 12시. 정확한 시간에 밥을 투여한 세월이 몇 년인가. 심지어 아침도 거른 상태로 점심 급식 한 끼를 기대하고 바라며 살던 때였다. 육체는 제 할 일을 해야만 했다. 꼬르륵. 조용한 옥상 입구에 웅장한 울림이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꼬오오오오오오르으으으으으으륵-.


역시, 배가 고픈 건 슬픈 일이었다. 잠시 식판을 노려보다가 녀석을 무릎 위로 올리고, 밥을 듬뿍 떠서 퍽퍽 국에 말았다. 

'먹어야지, 먹는 게 남는 거야. 내가 왜 굶어 흥.'

조금 더 지나면, 식사를 마친 아이들 무리가 여기저기로 쏟아져 다닐 터였다. 그 이름 모를 아이들에게, 홀로 옥상입구에 앉아있는 모습을 들키기도 싫었다. 

'그 나쁜 계집에는 밥도 다 먹었을 텐데. 나 혼자 왜 굶어.'

푹 익은 시래기가 달큼하게 혀를 감쌌다. 어우, 이 와중에 맛있고 지랄이야. 탄수화물이 들어가자 뇌가 활동이란 것을 하는 듯했다.

'내일부터는 누구랑 밥 먹지?'

아주 현실적인 질문 하나가 툭 떠올랐고, 입안 가득 시래기와 밥알을 씹으면서 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전학 이후 가장 깊게 사귄, 제일 친한 친구였다. 어머니의 부재, 부산에 있는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 등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아이. 얄미운 건 얄미운 거고, 상실은 커다랬다. 밥알을 아무리 씹어 삼켜도 뱃속 빈자리가 채워지지는 않았다.




이후 한동안 '눈물 젖은 빵'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이날이 떠오르곤 했다. 엉덩이에 느껴지던 계단의 딱딱한 차가움과 밥을 쑤셔 넣을 때 입가에 닿던 숟가락의 느낌, 뜨듯 미지근했던 국물의 온도, 계단 앞으로 보이던 하얀 벽, 벽 위의 창문, 창문으로 보이던 파아아아아란 하늘까지. 아마도 가을쯤이었을까. 모든 장면이 꽤나 선명했고, 떠오를 때마다 “나쁜 년”을 읊조리기도 했었다.


B와 다시 연락이 닿은 건 대학생이 된 후였다. 어색할까 하는 우려도 잠시, 우리는 늘 친했던 사이처럼 다시 또 자주 만나며 어울렸었다. 만날 때마다 신나게 술을 퍼 마시며 수년간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또 어느 날 스르륵. 멀어졌다. 학교도 전공도 달랐고 졸업과 취업이라는 과제 앞에서 우리 삶은 또 한 번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요즘도 가끔 궁금하긴 하다. B는 잘 살고 있을까. 그럼에도 굳이 찾아 나서고 싶지는 않다. 그저 잘 살기를 바랄 뿐. 이유도 딱히 모르겠다. 그 모든 시절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서, 아득한 채로 그냥 두고 싶은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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