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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n 29. 2024

'뭐 먹지'와 '뭐 하지'

/ 프롤로그 / 

“점심시간에 대해 써보면 어때요?”


'점심'이라는 주제를 추천해 준 건 J였다. 나의 글과 삶과 생활, 그 대부분을 알고 있는 친구이자 출판업 종사자이기도 한 그녀. 내가 아는 한 J는 타인에게 권유나 제안 같은 걸 쉽게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J의 제안이라니. 절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J가 말하는 점심이라는 주제는 들으면 들을수록 회가 동했다. 회가 동한다는 건 배 속에서 회충이 꿈틀거린다는 의미라 했던가. 그 표현 그대로, 배 속 어디에선가 꿈틀 '이거 재밌겠다' 하는 느낌이 왔다. 


아, 재미에 대한 부연설명도 필요하겠다. 여기서의 재미란, 글을 쓰는 '내가' 즐겁겠다는 의미일 뿐, 읽는 사람의 재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쓰면서 내가 울었으니 읽는 사람도 슬프기를, 쓰면서 내가 신났으니 읽는 사람도 즐겁기를 바라며 쓸 뿐. 읽는 사람의 재미 같은 걸 짐작하는 건, 내게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저 나는 내가 즐겁게 써 나갈 주제가 필요했다. 운 좋게 두 권의 에세이를 출간했지만 '그다음', 대체 뭘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두 책에 들어간 대부분의 글들은 1년의 육아휴직 동안 뱉어낸 것들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그것을 글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구토 혹은 정화랄까, 그런 단어가 더 어울리는 그 무엇. 드글드글 마음에 맺혀있던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을 마구잡이로 뱉어낸 결과물. 구성이나 흐름 같은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당장 무너질 것 같은 시간을 버텨내려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으니까. 그게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고 전부였다.


문제는 그다음. 오, 글 쓰는 거 재밌지, 신나지, 근데 이제 그다음, 나는 이제 뭘 써야 하나. 내 삶에 더 이상 쓸 게 남아 있긴 한 건가. 지금까지 써댄 원고 정도의 주제, '풀어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무게로 떠오르는 글감이 없었다. 잔뜩 체한 일들은 다 뱉어냈고 마음은 편해졌고 그다음은 뭘 쓰나. 그러던 시기에 J가 추천해 준 것이 점심이었고, 그야말로 오랜만에 재미를 느꼈다. 






우선, 이 주제를 추천한 사람이 J라는 게 재밌었다. J와 나는 벌써 수년째 점심시간에 만나는 사이였다. 나는 워킹맘. 평일 낮엔 직장에 매여 있어야 했고, 퇴근 후엔 아이를 챙겨야 했다. 아이를 전남편 집에 보내는 그 '랜덤'한 주말에, 갑자기 약속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 결국 만만한 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은 고작 1시간. 이동 시간마저 아껴야 했기에 약속 장소는 늘 내 회사 근처일 수밖에 없었고, J는 일방적인 모든 이유들을 수용하고 기꺼이 내 회사 주변으로 왕림했다. 고마운 마음을 그대로 담아, 나는 메뉴 선정에 최선을 다했다. 어쩌다 보니 17년이나 다닌 회사. 주변은 백화점이 들어서있는 번화가였다. 다양한 가게들이 피었다 지곤 했고,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은 노포들도 골목골목 즐비했다. 


17년이나 이 동네를 배회한 나는 '지박령'. 회사 동료들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바꿔 말해 다들 이 동네를 꿰고 있었고, '새 식당 오픈' 같은 이슈에는 모두가 관심을 기울였다. 동료들의 평판까지 모아 섭렵한 식당들로 J를 꼬드겼다. 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을 툭 찍고 가게 링크 전송. 그렇게 나는, 음식 사진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점심이 벌써 수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꺼리는 건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피하는 건지 여전히 명확하진 않다. 이유가 뭐든, 아무튼 우리의 점심은 늘 우리 둘이었다. 작년 연말 즈음부터는 독서모임도 시작했다. 누구랑? 역시나, 둘이서였다. 맛집 사진으로 가득 찬 카톡에 책사진들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런 J였다. 수년간 점심시간 만남을 이어온 사이. 그런 J가 추천한 주제가 점심시간이라니. 흥미로웠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점심시간에 진심이긴 했다. 1시간이라는 명확한 한계. 짧다면 짧을 그 시간이 내게는 소중한 '자유 시간'이었다. 오롯이 나만 생각하면 되는 시간. 나 뭐 먹고 싶니?, 나 뭐 하고 싶니? 오로지 나만을 위해 물었고, 나만을 위해 움직였다. 다른 식사 시간은? 아침식사는 아이 밥 차려주기에도 빠듯했으므로 패스, 저녁 식사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메뉴로 골라야 했다. 매운 건 빼고, 자극적인 것도 빼고, 생선도 빼고. 해물찜, 냉채, 회 등도 모조리 탈락. 외식을 할 때는? 함께 밥을 먹을 상대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골랐다. 왜냐고? 나는 못 먹는 게 없었으니까. 회도 오케이, 핏물 흐르는 레어 스테이크도 너무 오케이, 곰장어? 너무 사랑하고, 곱창? 없어서 못 먹고 등등. 그러다 보니, 온전히 나를 위해 메뉴를 고르는 점심시간이 특별하긴 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반복되자 질문의 영역이 확장됐다. 

"점심시간에 뭐 할까?"

'어차피 혼자 먹는 밥, 간단히 먹고 다른 거 해도 되지 않아?'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출근 전날 자리에 누워서는 내일에 대해 계획했다. 업무 시간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고 점심시간 계획은 별도로 세웠다. 8시간의 업무 계획은 한없이 짧았고, 점심시간 1시간에 대한 고민은 늘 치열했다. '점심 계획=메뉴'인 날도 잦았지만 다른 계획을 세우는 날도 많았다. '내일은 헬스장 가야지' 결심한 후에는 운동화와 함께 세면도구, 갈아입을 속옷 등을 챙겼다. '날씨 좋다니까 산책해야지'하는 날엔 걸어 다니기 편한 옷을 골라 입었다. 하루 1시간. 그 1시간 동안 무엇을 할지에 따라 내 출근 복장과 가방 안 구성품이 달라졌다. 






점심(點心). 찍을 점(點)과 마음 심(心)이 만나 이루어진 단어. 마음에 점을 찍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아침식사 후 저녁식사 전까지,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고 허기로 인해 마음이 심란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점 찍듯' 간단하게 먹은 것이 점심의 기원이라고. 

점심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등장한 건 15세기 초 『태종실록』이다. 마음에 점화(點火)한다는 뜻의 ‘점심(點心)’은, 허기가 져서 집중력이 떨어질 때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마음에 불이 반짝 붙을 정도로 간단하게 먹는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런 유래들이 이어져 현재 중국에서는 간단한 다과, 간식을 ‘뎬신(點心)’이라 부르고, 작은 만두 몇 개 정도의 먹을 것을 지칭하는 ‘딤섬’이라는 단어도 뎬신을 뜻하는 남방 광둥어에서 왔다고. (출처 국가유산청 <문화재사랑> 2021년 11월호)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야 마음에 점을 찍는 것이 '음식'이었겠다만, 요즘 사람들에겐 그 의미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허기가 지든 배가 부르든 위장 상태와 상관없이, 정신은 늘 없고 마음은 늘 심란한 거 아닌가? 그럴 때 음식을 넣는다고 마음에 불이 반짝 들어올까. 음식도 정보도 병도 사람도 죄다 넘쳐나는, 정신없는 이 시대에?

내 경우엔 그랬다. 먹을 걸 그렇게나 좋아하지만, 음식만으로는 도무지 마음에 점화가 되지 않았다. 늘 칙칙한 상태랄까. 음식보단 다른 것이 절실했다. 그래서 누렸다. 점심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자유시간으로. 회사 주변은 앞서 말했듯 번화가였고, 쇼핑이든 독서든 운동이든 무엇이든 가능했다. 매일 주어지는 1시간, 마음에 '쉼표' 하나 찍어보려 나름은 애썼던 그 시간들을 나눠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 삶의 자리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따라 점심의 모습이 급변함을 깨달았다. 메뉴 선택권 없이 급식을 먹던 학창 시절부터 돈에 따라 메뉴를 골랐던 대학시절, 선배들을 따라 낮술을 배웠던 사회초년생,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아이 입에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해진 엄마의 시기까지, '점심시간으로 또 뭘 써볼까' 떠올리자 지난 삶의 시간들이 줄줄이 엮여 나왔다. 지나간 시절을 추억도 하고, 요즘의 점심에 대해 수다도 떠는 시간. 수다 좋아하는 '쓰는 나'가 슬슬 재미를 느끼는 이런 기분, 오랜만이다. 덧붙여 읽는 사람도 즐거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무튼 그런 수다를 위한 빌드업 첫 질문. 


"오늘 점심, 무엇을 드셨나요? 어디서? 누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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