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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별 아나운서 Nov 23. 2020

당신은 그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가 있습니까?

[AI가 방송하면, 아나운서는 뭐해? #09]

방송국의 최대 강점 ‘시스템’, 방송국의 발목을 잡다


글을 쓰는 오늘,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데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옆 스튜디오 공사 때문에 순간적인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청취자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짧은 시간에 

예비 전력이 공급되면서 방송은 이어졌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미 방송국에는 수 년 동안 쌓여온 

시스템과 매뉴얼이 있었습니다. 

시스템은 순간적으로 방송 사고를 막았고, 

진행자인 저희도 자연스럽게 매뉴얼대로 

사과 멘트를 하고 방송을 이어갔습니다. 

너무도 깔끔하게, 평소처럼. 

각자의 역할의 세분화 되어 돌아가니 

어느 누구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죠. 

방송국에 다니는 누구나 느낄 테지만 

방송국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이 ‘시스템과 매뉴얼’입니다.


방송국이 통제하고, 제작하고,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방송 환경에서는 

모든 것이 시스템과 매뉴얼 안에서 돌아갔습니다. 

편했죠. 

그리고 시스템 안에서는 구성원 개인의 개성과 역량 보다, 

시스템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더 환영 받았습니다. 

누가 들어오거나 나가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흔들림 없는 시스템 말이죠. 

이 시스템과 매뉴얼 밖의 영역은 오히려  ‘사고’로 간주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대비를 했습니다. 

때로는 ‘틀린 방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야 시스템 내에서 

절대 사고가 ‘안’ 나는 방송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스템과 매뉴얼에 모든 것이 맞춰졌습니다. 

구성원도 프로그램도, 심지어 시청자까지도. 



방송국의 최대 강점은
'시스템과 매뉴얼'입니다
누가 들어오거나 나가도,
절대 흔들림 없는 시스템



그런데 뉴미디어 시장에서는 

이러한 방송국의 시스템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있습니다. 

뉴미디어 환경에서 플랫폼이 변화하고, 진화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현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방송국의 시스템과 매뉴얼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기존에는 ‘사고’라고 부르던 현상들이 

오히려 뉴미디어 시장에서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기존 방송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상황과 장면들이 

뉴미디어에서 생산되고, 시청자는 열광합니다. 

기존 미디어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이 

기존 미디어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직접’ 찾아서, 

힘을 실어주는 세상이 된 겁니다. 


세상이 바뀌니 방송국도 뉴미디어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방송국은 기존의 시스템을 적용하더군요. 

섬세한 감정을 따야하는, 

그래서 카메라 노출도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인터뷰에 

크고 부담스러운 방송국 ENG 카메라가 등장합니다. 

‘좋은 장비를 놔두고 왜 안 쓰냐’면서요. 

철저하게 생산자 중심의, 시스템 중심의 사고였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작업하기가 쉽거든요.

그것을 위해 구축된 시스템이기 때문이니까요.


크리에이터 섭외가 어렵습니다. 

공고를 내도 지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뉴미디어 세상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가진, 

일종의 미디어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들을 

기존 미디어가 섭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콘셉트가 맞지 않으면 그들은 방송에서 얻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미 미디어와 동등한 위치의 그들을

방송국은 '섭외' 혹은 '활용'으로 접근합니다.

참 답답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친분을 이용해서 어렵게, 어렵게 

A라는 크리에이터를 섭외했습니다. 

자신의 콘텐츠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을 

섭외비 한 푼 없이 출연시켜 놓고, 

갑자기 더 잘 나가는 B를 섭외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유튜브 알고리즘과, 채널의 성격과 방향, 구독자의 분석 없이 

백화점 식으로 콘텐츠를 모아놓는 채널을 만들어서 

조회 수와 구독자를 고민하는 시스템. 

편집에서도 방송의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고 

다른 것들은 틀렸다는 좁은 안목과 방향성. 


그동안 방송국을 든든하게 지켰던 시스템은 

오히려 방송국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적어도 뉴미디어 플랫폼에서는 말이죠.



기존 미디어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이 
기존 미디어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직접’ 찾아서, 
힘을 실어주는 세상이 됐습니다
 




당신은 그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가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우리 아나운서는 

그런 훈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방송 시스템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역할.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하는 진행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평가. 

방송 안에서, 우리는 튀는 것 보다는 

두루두루 어울릴 수 있는 것을 

아나운서의 자질, 덕목이라고 훈련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맞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균형을 맞추고 조율을 하는 역할이라면 

아나운서는 정말 좋은 진행자이자 출연자이죠. 

우리가 해왔던 방송 안에서는 

그런 역할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나운서’ 하면 떠오르는, 

시청자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모습이었고, 

제작자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역할일 테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변화하는 뉴미디어 플랫폼에서도 

우리는 무난하게 녹아드는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아나운서들이 나오는 유튜브 영상들은 ‘엣지’가 없어. 너를 포함해서.”


이 글을 쓰기 전, 

구글에 근무하는 뉴미디어 전문가 선배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아나운서 저널에 쓸 글의 방향을 얘기하니, 

저와 만나기 전 아나운서들의 브이로그를 비롯한 

아나운서의 유튜브 영상들을 일부러 찾아보셨더군요. 

그리고 제 영상을 포함해서, 

그 영상들에 ‘매력이 없다’는 얘기가 돌아왔습니다. 


‘너무 잘해서’ 매력이 없다. 

예술을 하는 분들이 자주 쓰는 뾰족함, 소위 ‘엣지’가 없다. 

방송을 너무 잘 알아서, 

이 화면에 자신이 어떻게 나오는지 너무 잘 알아서, 

스마트 폰으로 보는 유튜브 영상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뉴미디어에서도 방송처럼 해왔나 봅니다. 

그래서 분위기도, 톤도, 모습도 

새로운 플랫폼에 우리가 맞추기보다, 

우리에게 그것을 맞추려고 했나 봅니다. 

누군가 들어와서 참여할 여백 없이, 

가득 채워서 그렇게 내놨나봅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뉴미디어 세상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듣고만 있었습니다.



아나운서들이 나오는 유튜브 영상들은
‘엣지’가 없어.
너를 포함해서.


아나운서에게도 소위 '엣지'가 필요합니다


한 때 굉장한 반향을 일으킨 유튜버 <띠예>의 영상. 

만약 띠예가 바다포도를 먹을 때 

헝클어진 머리가 아닌 단정한 머리였다면, 

마이크를 테이프로 볼에 고정한 모습이 아닌 

전문 유튜버의 ASMR 전문 마이크를 썼다면, 

배경으로 자신의 방 안 벽지가 아닌 

SAVAGE 배경지가 보였다면, 

책상 스탠드 불빛이 아닌 

뷰티 유튜버의 원형 조명이었다면 

과연 이런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을까요? 


누가 봐도 스마트폰으로 찍은 화면에, 

우측 상단의 ‘KINE MASTER’ 로고까지 더해져서 

띠예만의 분위기를 만들고 

우리가 더 친근하게 느낀 거겠죠. 

하나만 어긋났어도 어색했을 겁니다. 

물론 띠예가 이 모든 것을 의도한 건 아닐 겁니다. 

톤과 매너, 분위기는 

의도한다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죠. 


엣지 없는 우리 영상의 톤과 매너, 

유튜브에 맞지 않는 분위기도 

어쩌면 방송국의 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됐을 겁니다. 

우리도 모르게 그것들이 영상 속에 나와 버리듯이. 

영상은 텍스트와 달라서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청자는 

그것들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냅니다. 

방송국 시스템에 딱 맞춰진 모습으로 

뉴미디어에 등장한다면, 

그 영상을 본 대부분은 과감히 ‘뒤로 가기’를 누를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니까요. 


화면에서 보이는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서 '띠예' 신드롬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KBS, 혹은 아나운서가 우리 앞에 붙는 순간 

이미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을 겁니다.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이게 되겠죠. 


이제는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할 때입니다. 

<아나운서> 라는 이미지에 의존한 것도 사실이고, 

방송국 시스템 안에 맞춰진 모습에 길들여진 것도 사실입니다. 

방송이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플랫폼과 새로운 미디어에서의 우리를 고민한다면? 

과감히 결정해야합니다. 

용기를 내야합니다.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 


당신은 과연, 그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가 있습니까?




이제는 조금 더 솔직해져야합니
당신은 과연,
그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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