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혹, 지천명이란 말, 쓰지 않기로 해요
일본의 한 요양병원에서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회적 실험을 진행했다. 수용 인원의 대부분이 7~80대 노령자였다. 요양원 내부의 달력과 시계를 모두 치우고 30년 전 유행한 대중가요를 하루종일 트는 한편, 그 즈음의 유행어를 노인들이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약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남성들은 마당을 쓸고 공구와 목재를 구해와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잊고 지냈던 뜨개질을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횟수가 줄고 계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참여자들이 건강한 신체로 한창 사회활동을 하던 4~50대를 떠올리는 순간, 그때로 신체도, 정신도 돌아가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혹은 30년 전 당신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체는 건강했고, 정신은 도전과 패기로 가득한 시절이었다. 무언가를 포기하기보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결국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데 익숙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당신 역시 마찬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고 믿어 보라. 그리고 젊은 시절 유행가 가사를 읊고 난 할 수 있다! 여전히 활력이 넘친다 일기를 써보라. 그 순간,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젊어질 것이다. 내가 스스로 젊다는데 감히 누가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단어는 그 자체로 힘을 품고 있다. 입으로 내뱉고 글로 쓴 순간 단어는 구체적인 에너지 파동을 일으키며 이는 사람의 행동과 정신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세상이 변하고 평균수명은 이제 100세를 넘어 120세를 넘보고 있다. 한 미래학자는 ‘재수없으면 200살까지 산다’며 자조적인 농을 던지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과연 마흔이면 불혹, 쉰이면 지천명이라는 말이 통할까. 어림도 없다. 공맹 시절에나 통했을 법한 이야기를 현대인이 끌어다 쓰는 것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위다.
우선 평균수명이 늘었다. 조선 시대 평균수명은 마흔 살이었다. 공교롭게 선조들은 나이 마흔이면 세상일에 미혹됨이 없는 ‘불혹’이라 칭했다. 건강관리를 잘해 소천하지 않고 나이 오십까지 살게 되면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이라는 영예를 주기도 했다.
당시 사회는 발전의 속도가 극히 느렸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모를 심고, 그러다 남동쪽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여름이 다가오는데 이 즈음에는 장마에 대비해 지붕과 배수로를 정비하여야 한다. 이렇게 4계를 10번만 경험해도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사회 변화에 지혜를 설파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하루하루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니 1인 플랫폼이니 키오스크니.. 어찌어찌 배워나갔더니 이젠 AI시대란다. 사람이 몇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을 뚝딱 몇 초만에 수행해버리는데, 그 AI마저 초단위로 발전하고 있어 ‘초격차 사회’라 불리기도 한다.
마흔이 넘은 당신, 정말 세상일에 미혹됨이 없는가. 쉰이 넘은 당신, 정말 하늘의 뜻, 세상의 이치를 모두 통찰하고 있는가.
세상이 변했다. 더는 우리끼리 불혹, 지천명이라는 말은 쓰지 않기로 약속하자. 평균수명이 늘었고, 당신은 아직 절반밖에 살아내지 않았다. 아직 짱짱한 청춘인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나잇대에 따른 생애주기 정의는 다시 되어야한다.
20세부터 50세까진 청년, 50세부터 70세까진 중년, 70세부터 85세까지 장년, 85세 이후부터는 노년으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당신은 아직 충분히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 나잇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제 갓 청년을 넘긴 애송이 주제에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건방 떨지 말라.
몸에 넘치는 힘과 에너지, 정열로 스스로를 키워보자. 운동을 시작하고 독서를 통해 내면을 키워보자. 자격증을 따고 2막, 3막 인생을 영위할 새로운 직업을 찾아보자. 바리스타, 한복 디자이너, 출간 작가, 유튜버, 블로거... 당신이 하겠다는데 불가능한 일은 없다.
다시 상기하라. 당신은 한참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 당신은 스스로를 얼마든지 키워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