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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하이 SG Nov 29. 2022

어느 날 딸이 울었다.

상하이 여자 vs. 한국 남자 - 장인어른 시점

나는 글을 처음 쓰니 간단히 내 소개부터 시작해 보도록 해봅니다.


나는 1952년생으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국은 격변의 시기였고 문화 대혁명과 하방운동(下放运动 - 도시 지식인, 학생, 시민을 농촌으로 내려보냈다고 해서 하방이라 표현)이 발생했던 때였고, 상하이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 중 한 명은 시골로 내려가야만 했다. 하방운동의 배경은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에는 대량 실업문제가 발생하고 반대로 농촌은 일손이 부족한 문제 그리고 학생, 지식인들에게는 사상개조라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던 운동이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니 당시 아무도 농촌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아 버틴 먼 이웃이 있었는데 매일 사람들이 몰려와서 가족 중 한 명이 내려가기 전까지 15일간 북, 꽹과리를 치는 광경도 목격했다. 버틸 수 없었다. 1967년 당시 16살이던 장남인 내가 시골로 내려갔다. 한참 먹어야 할 때 식량이 부족한 농촌이라 먹을 것들을 챙겨 먹지 못해 우리 집에서 나의 키가 가장 작다. 아버지와 동생은 177cm 정도의 키인데 나만 170cm가 되지 않을 정도니 그때의 영향이 컸던 듯하다.


태생이 성실한 편이라 당시 농촌의 국유기업에서 일했는데 간부까지 되기도 했다. 직장동료의 소개로 지금 아내를 만났고, 그녀 또한 가족 중 한 명이 시골로 내려와야 했는데 1남 2녀 중 막내였다. 아내의 오빠는 당시 군대, 언니는 농장에서 일할 때라 아내밖에 남는 사람이 없어 막내임에도 상하이에서 안회 성의 시골로 내려왔다고 한다.


딸아이를 놓았고 아들이 아닌 것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우리 부부 모두 일을 해야 했기에 딸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다. 장모님, 장인어른이 상하이에서 맡아서 키워주셨고, 우리 부부는 쉬는 주말에 한 달에 2~3번 상하이에 올라가서 딸아이를 보고 다시 내려오곤 했다. 매주 못 가고 2주 만에 가면 우리를 몰라보는 통에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딸아이가 7살까지는 딸아이는 상하이에 우리는 안회 성에서 따로 살았다. 


딸아이가 학교를 갈 때가 되었다. 조건이 좋은 도시의 상하이 학교에 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딸아이는 안회성(安徽省)의 시골 내가 당시 살았던 한 지역에서 태어났으니 안회 성의 호적을 갖게 되었고, 안회 성의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우리 집에선 덩샤오핑(등소평)은 영웅이다. 

우리 인민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 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가족이 모두 상하이에 복귀해서 다시 살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 정책이 바뀌었고, 먼저 딸아이의 호적을 상하이로 바꾸어 먼저 상하이에 보내어 상하이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주말마다 상하이에 들러 딸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보니 위태위태했다. 나도 하방 정책으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딸도 공부를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따로 사느라고 딸아이의 공부를 봐줄 사람은 없었다. 시골 학교에서는 반에서 1등을 하고 반장을 했지만 상하이에 올라오니 공부가 중간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이 먹고 자는 것은 보살펴줄 수 있었으나 공부까지 봐주기에는 쉽지 않았다.


딸아이가 먼저 상하이에 올라온 3년 후 드디어 방법을 찾았고, 나와 아내도 상하이에 돌아올 수 있었다. 드디어 한가족이 함께 살 수 있었고, 그다음부터 엄격하게 공부도 돌봐주기 시작했다.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갔고, 외국계 회사에 취직을 했고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다. 상대적으로 남동생의 딸과 여동생의 아들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 명문대에 입학하지는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딸아이 관련하여 단지 작은 걱정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딸아이 성격이 좋지 않다는 것. 10년간 떨어져 살며 어렸을 때부터 우리와 함께 하지 못했고, 상하이에서도 3년간 우리와 함께 살지 못했기에 우리보다는 외할머니와 더 친했다. 그 영향일 듯하다.

둘째는 27살이 되도록 남자 친구가 없었다는 것.


최근 딸이 수상하다. 감정과 표정의 변화가 심하고 잘 웃기도 표정이 안 좋기도 하다. 자꾸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하는 통화가 늘었다. 잠에도 1시간씩 통화도 한다. 분명 남자 친구가 생긴 거다. 아직 말은 하지 않고 있어 우리도 굳이 아는척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기대를 했다. 드디어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근데 할 말이 있다고 한 딸이 말은 하지 않고 눈물만 쭈르륵 흘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남자 친구는 있는 것 같고 딸아이는 말을 하지 않고 울고 있고, 안 좋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아내가 딸에게 묻는다.

"너 혹시 임신했니?"


다행히 고개를 젓는다. 그럼 왜 우냐고 물으니 그제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외국인 남자 친구가 있는데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까 봐 겁나서 그러는 거라고 한다.

일단 최악의 경우는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난감하긴 하다. 처음 사귄 남자 친구가 외국인이라니 말이다.

기회를 봐서 보자고 했다.  


뭔가에 홀린 듯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 달 딸의 남자 친구를 처음 보게 되었다. 만나서 처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날 나는 며칠 전 식당에 미리 가서 딸아이의 남자 친구가 뭘 좋아할지 모르니 14가지 음식을 먼저 주문해 놓았고, 그가 도착하자 하나씩 음식을 내오도록 했다. 그가 중국어를 할 줄 모르니 내가 중국어로 물어보면 딸아이가 영어로 통역해주고, 그가 영어로 대답하면 딸아이가 다시 중국어로 통역해 주는 식이었다. 일단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같은 외국계 회사이고 영어도 할 줄 알고 자격증도 있다고 하니 기본 신분은 확인된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 


딸아이의 남자 친구를 본지가 엊그제 같은데 그다음 달에는 딸아이가 한국에 가서 남자 쪽 부모님들을 만나 뵈었고, 다시 그다음 날에는 그쪽 부모님이 상하이를 방문해서 우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척척 너무나 빠르게 진행이 되는 듯했다. 게다가 그쪽 부모님들과 상견례 바로 다음날 정식 혼인신고까지 중국에서 먼저 한다는 거다. 뭐가 이렇게 빠른 거야~


혼인신고는 했지만 정식 결혼식은 한 게 아니니 아직 잠은 같이 자면 안 된다고 했다. 내년 5월에는 한국에서 내년 9월에는 중국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으로 협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딸아이의 통보를 받았다.

그건 그렇고 혼인신고까지 했는데 딸은 상하이에서 그 남자는 서울에서 따로 살고 있다. 딸아이 말로는 남자 친구가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고 중국에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열심히 구하고 있다고는 한다. 내가 보니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는데 취직은 무슨. 한참은 있어야 할 듯하다. 혼인 신고 후 결혼식까지 5개월 동안 딸아이와 많이 싸우기도 했다. 결국 너와 너의 남편은 같이 살아야 할 테고 그 남자가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딸아이는 한국으로 가야 할 테니 말이다. 우리의 유일한 자녀는 딸 하나인데 그럼 앞으로 자주 못 볼 것 아닌가 말이다. 괘씸하기도 했다. 그동안 키워주었는데 '우리를 내팽게치고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고?'라고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은 커져갔다.


5월과 9월 두 번의 결혼식을 했다. 5월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비밀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나와 아내만 한국에 결혼식을 참석하러 다녀왔다. 심지어 친동생 2명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9월 중국에서의 결혼식. 두 번의 결혼식 사이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사위가 중국에 일자리를 잡았다는 거다. 아쉽게도 상하이는 아니지만 바로 옆인 난징(南京)이라 자주 볼 수 있는 거리다. 그리고 사위가 지금은 중국어를 못하는 상황이라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다. 몇 년 일하고 나면 중국어를 잘하게 될 테고 그럼 상하이에도 언젠가 일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했다.


결혼식 1달 후 딸아이도 직장을 그만두고 난징에 있는 사위 곁으로 갔다. 그리고 난징에서 일자리를 잡을 거라 했지만 결국 2년간 일을 하지를 않았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일을 하지 않고 가정주부로 있다니 또 화가 났다. 상하이 친구를 만났으면 상하이에서 잘 살았을 텐데 다른 도시에 있지를 않나 일을 안 하지를 않나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식 2년 후 딸아이가 아이를 가졌고, 아이 놓기 3개월 전에 우리 집으로 왔다. 아이를 놓고 딸아이와 아이를 함께 길렀다. 사위는 주말마다 난징에서 상하이까지 300km를 운전하며 다녀갔다. 4개월 후 사위가 상하이에 일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동시에 딸아이도 일자리를 찾았다. 12월 1일 동시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손녀딸 덕분이다. 사위가 상하이에 일자리를 잡고, 딸도 일을 하게 된 것들 말이다. 


모든 걱정이 없어졌다고 느껴졌을 때,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11층 집을 딸의 가족에게 양보하고 부모님이 사시는 16층 바로 옆집에 살게 되었다. 

수시로 11층에 내려가서 일을 돌봐주었는데 사위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것이다.

사위는 매일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11시에 집에 들어왔다. 매일 사위가 몇 시에 들어왔는지 물어보는 게 일이었다. 토요일에도 기본적으로 출근을 했다. 야근한다고 새벽 3시에 들어온 적도 있다. 보니 술은 먹지는 않았더라.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이 얼마나 많길래 무슨 그리 야근을 하는지 말이다. 내가 다녔던 국영기업에서는 야근이란 개념이 없다. 평일 야근하면 1.5배, 주말 야근하면 2배의 급여를 주어야 하므로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야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식도 한두 달에 한 번이 전부였다. 사위를 보니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 술을 마신다. 영업도 구매업무도 아니고 지원업무인데 무슨 업무의 연장이라는데 횟수가 적지가 않다. 집안일을 하는지 보면 집안일도 별로 하는 것 같지 않고 손녀딸을 잘 보살피는 편도 아니다. 손녀딸은 우리 차지다. 매일 보는 것도 모자라 주말에도 도와줄 때도 있다. 이래저래 딸만 고생이다. 왜 집안일 안 하는 외국인과 결혼해서 고생을 자처하는지 종종 열불이 난다. 그렇다고 대화가 되지 않는 사위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그렇게 딸아이가 결혼 후 8년쯤 되던 날 우리가 폭발했던 것 같다. 이게 다 사위가 우리를 가르쳐 들었기 때문에 참고 참다가 나타난 폭발이다.


한 달 전쯤 사위가 썼던 포스팅이 아래 관련 사항이다.


09화 장모님 장인어른과 싸우고 1년간 대화하지 않은 사연 (brunch.co.kr)

 

지금은 싸울 일이 없다. 

손녀딸은 커서 우리가 돌봐줄 일이 없고 아내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는다. 그동안 갈등은 다 아내가 힘들어했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딸과 싸웠던 것이다. 아내는 사실 딸이 어렸을 때 본인이 키우지 않았다. 장모님이 90% 키워주셨고, 우리 부모님이 5% 도와주신 정도 그리고 내가 4% 아내가 1% 정도 될 듯하다. 가끔 주말마다 상하이에 가서 가는 기저귀도 딸의 똥이 더럽다고 갈아주지 않아 모두 내가 다 갈아주었다. 아내는 고혈압에 몸도 약하다. 무리를 하면 바로 반응이 와서 적당히 쉬면서 일해야 한다. 요새 다시 여유가 생긴 듯하다. 심심한지 딸아이에게 일주일에 두 번 반찬거리를 해준다. 손녀딸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구성해서 말이다. 최근 내가 일주일에 한두 번 버스 타고 딸네 집에 가져다주면서 손녀딸을 보는 것이 낙이다. 요새는 손녀딸도 바쁘다. 공부하느라 바빠 한두 달에 한 번씩 점심 혹은 저녁 식사해야 여유 있게 대화하면서 볼 수 있지 집에서 만날 때는 만나면 인사만 달랑하고 다시 자기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기 바쁘다.


그래~ 좋은 것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겠지 싶다.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던 사위, 이젠 적응이 좀 된 듯도 하다. 


집에 뭔가 고장이 나면 사위가 아니라 딸이 직접 고친다. 딸도 안되면 내가 가서 고쳐주고 나도 안되면 그때 사람을 불러 해결한다.

감자볶음 할 때 감자를 얇게 써는 건 나의 일이었다. 사위가 요리를 배웠다고 본인이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자리를 내어 주었다. 3분이면 될 일을 30분이나 감자 하나를 썰고 있다. 얇아서 식감은 좋으나 두 번 시켰다가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다. 다시는 시키지 않고 있다.

우리와 함께 4박 5일 시안을 놀러 갔다. 취향이 맞지 않는다며 반나절은 혼자 돌아다니겠다고 한다.

손녀를 위해 아내가 반찬을 하고 내가 배송을 하기도 했다. 종종 손녀 것을 다 먹어버렸다고 손녀가 전화해서 이르기도 한다. 뭐라 하겠나? 그냥 아빠 보고 조금씩만 먹으라고 이야기하라고 했다.

여행을 가면 일주일 전 준비물을 다 준비해 놓는 우리와 달리 전날조차도 미리 짐을 꾸리지 않는다.

출장 가는 당일날 최소 3시간 전에 도착하는 우리와 달리 출발시간 2시간 전 그제야 집을 나선다.


처음엔 속이 터졌다. 잔소리도 조금 했다. 전혀 듣지를 않고 변함이 없다. 

지금은 남일 보듯이 하고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보고 있으나 여전히 쉽지 않을 때도 있다.  


단점만 이야기했으니 장점 하나 아니 두 가지를 이야기해본다.


첫째, 나쁜 딸아이 성격을 잘 받아주며 헤어지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사위의 성격 좋은 건 인정한다.


둘째, 친동생 그리고 친척들로부터 자녀로부터 용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구정, 생일 혹은 어버이날에만 주던 용돈을 사위가 2년 전쯤인가 격월로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위에게 돈을 받는 게 어색했다. 사실 연금이 나오니 별도의 용돈은 필요도 없었다. 다만 생각해 주는 건 좋았다. 아내는 딸이 고생하는데 그 돈을 어떻게 받냐고 안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 다르다고 이야기했고 2년 넘게 잘 받고 있다. 그 돈 없어도 전혀 상관없으나 마음이 고맙다. 딸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는 용돈이라 더욱 그렇다. 


하여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렇게 처음 사위 얼굴 본 이후 만 16년이 흘렀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나 잘 살고 있으니 되었다 싶다.  



<사위 입장>


내가 보기에 장인어른은 정직하고 세심하고 굉장히 가정적이다. 단점이라면 작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 친구가 없으신 건 내 입장에서는 단점은 아니고 내가 상관 할바도 아니다. 다만 덕분에 아내로부터 구박은 받는다. 99%의 시간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와 비교하니 너는 도대체 가족이 중요해 친구들이 중요해 라며 말이다. 


장인어른 16살에 한창때 혼자 농촌에 내려가서 생활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자존감이 높을 수가 없고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으셨겠지 싶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많으시다. 이 친구가 나를 존중하는지 존중하지 않는지에 특히 관심이 많으시다. 그걸 몰랐고, 지금은 잘 알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는 표현을 못하니 용돈이 그런 목적 중 하나다. 나는 당신을 존중하고 있고 고마워하고 있고 그래서 돈은 얼마 안 되지만 그런 마음의 표현이라는 뭐~ 그런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장인어른은 좋아하시고 장모님은 여전히 부담스러워하신다. 우리 집 오시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항상 차를 타드 린다. 무슨 차를 드시냐고 물으면 항상 아무거나라고 하신다. 그래서 대홍포, 국화 보이숙차, 홍차 중에 선택권을 드리면 그제야 선택을 하신다. 과일을 갂아드리기도 한다. 감, 수박, 배 등으로 말이다. 어머니에게 배운 방식으로 적게 먹기 좋게 깎아 드리니 과일과 차는 내 담당이 되었다. 그거라도 잘한다고 인정받은 게 어디냐 싶다.


공항 이야기만 하고 마무리해야겠다.

준비성이 철저하고 모든 일을 미리미리 하시는 장인어른, 공항에 딱 맞게 가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다. 출장 3시간 전에 짐을 챙기기 시작하고 2시간 전에 항상 출발을 한다. 그럼 공항에 1시간 10분 전쯤 도착하고 그런 식으로 한국 출장을 다녔다. 처음에는 잔소리를 했고, 한 스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알았다고 하고 듣지는 않는다. 그분은 그분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소용이 없자 잔소리는 더 이상 못하시고 안절부절못하셨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이제는 안 보는 척하신다. 공항에 딱 맞춰 가는 것과 장인어른을 존중하지 않는 것과는 관계는 없는 일이다. 이건 장인어른을 위해 내가 맞출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건 그분이 힘들어하시든 말든 그분의 선택이다. 이걸 보면 나도 과히 좋은 성격은 아닌 듯싶다. 나의 소심한 복수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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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은 브런치 북으로 발행했습니다.

속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 1부가 도움이 될 듯해서 아래 링크를 걸어둡니다.


[브런치 북] 상하이 여자 vs. 한국 남자 (brunch.co.kr)


전편은 우리나라의 이웃인 중국. 그중에서도 한 도시인 상하이의 일반적인 이야기와 우리와 다른 문화 그리고 약간의 저희 경험을 담았습니다.

속편은 12화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편: 10화, 속편: 12화)

주 2~3회로 생각하고 있고요. 글쓰기 초보라 일정이 늦어지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 댓글을 주시면 초보인 제게 힘이 되어 글을 마무리하는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혹 글이 공감이 되어 구독하시면 알람이 되실 거고요.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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