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여자 vs. 한국 남자 - 장모님 시점
나도 브런치에 처음이자 마지막 글을 써본다.
남편이 기본 소개는 한 것 같으니 나는 더 간단히 이야기해 본다.
나는 1953년 생으로 1남 2 여중 막내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편이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힘들 때마다 부모님들이 많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특히 우리가 안휘성 시골(?)에 있었을 때 엄마가 우리 딸을 봐주어 안심하고 있을 수 있었다. 딸에게 가장 중요한 어렸을 적인 10년간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상하이에서 태어나서 상하이에서 살다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정부 정책(下放 정책, 농촌으로 내려감)으로 안휘성에서 25년을 살았고, 그 사이에 결혼을 하고 딸을 낳고 딸이 혼자 상해로 올라왔고 우리도 결국 상하이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상하이로 올 수 있었을 때쯤 사실 안휘성에서의 삶이 너무도 편하긴 했다. 남편이 국유기업 간부, 그것도 구매팀 간부라 여기저기 선물도 들어오고 내가 하는 일도 편하게 했다. 일부 구매 간부는 집을 몇 채를 샀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우리 남편은 고지식해서 공급상들과 식사만 하고 고가 선물이나 돈을 받지는 않았다. 그때 마셨던 적지 않은 고량주(白酒) 때문에 남편 간이 좋지 않아 지금은 많아야 일주일에 맥주 한잔 정도만 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회사 내에서 간부이다 보니 나는 더 자유롭게 일했다. 간단한 회계 일이라 오후에는 한가했다. 점심 먹고 회사 직원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고, 오후 잠시 밖으로 나가서 저녁 반찬 야채들을 사 오고 간단히 저녁식사 요리를 해놓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서 한 시간 마무리하고 정시 퇴근하는 일상이었다.
안휘성에서의 25년이 되었을 때 고민이 생겼다. 상하이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딸과 함께 사는 것은 좋았으나 안휘성에서의 편안한 삶이 사라질 것이 뻔했다. 남편도 간부에서 상하이로 돌아가면 처음부터 다시 일반 직원으로 시작해야 한다. 나도 그동안 편안한 삶은 사라질 터이고 다시 처음부터 일반 직장을 잡아야 할 터였다. 당시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이 느껴졌던 터였다. 남편이 아무래도 상하이로 가서 아이 공부를 돌봐주어야겠다고 한다. 결국 상하이로 돌아와서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딸은 나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대학입시 시험을 보고 와서는 떨어지면 어떡하냐고 울기도 했고, 결국 합격해서 대학교에 들어갔고 외국계 회사에 취직을 했다. 잦은 야근이 안쓰럽긴 했지만 뭔가 일을 잘하고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3년 후 50% 급여를 올려 다른 외국계 회사로 이직을 했고, 입사 후 몇 개월부터 외국인들과 무슨 프로젝트를 한다고 한다. 외국인들과 식사를 하고 주말에는 무슨 상하이 가이드를 해주기도 해서 혹시나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딸아이가 회사에서 외국인들과 한다는 프로젝트가 끝나갈 때쯤 밤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한다. 그동안 알던 친구인 것 같지는 않다. 목소리가 안 들리게끔 조심스럽게 하니 말이다. 남편이 앞서 이야기했던 우여곡절이 끝나고 드디어 딸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딸은 대학교 때도 직장에 다닐 때도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딸이 연애란 걸 한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외국인 게다가 한국인 이라기에 걱정이 되었다. 당시 사랑이 뭐길래 라는 당시 인기 있던 드라마에 따르면 한국이란 나라는 상당히 남성주의 사회였고 상하이와는 달리 여성들이 지위가 상당히 낮은 곳이었다. 남자가 한마디 하면 여자가 꼼짝 못 하는 내가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사회였다. 드디어 딸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중국어를 할 줄 모르니 직접적인 대화는 되지 않고 딸의 통역을 통해서 조금 이해했을 뿐이다. 만나보니 성실해 보이고, 예의도 바른 듯했고 나쁘지 않았다.
그때부터 궁금한 점이 생겼다. 5년간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었다.
'왜 이 친구는 한국에 있는 여자들이 아니라 내 딸을 선택했을까?'
드라마를 보면 한국에 그렇게 이쁜 친구들이 많은데 말이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시간이 흘러 딸의 한국에서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결혼 후 서울에서 살지, 상하이에서 살지 결정이 되지 않았음에도 딸이 원하는 데로 먼저 결혼식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한국에서 살듯 싶었다. 유일한 자식인 딸아이를 이제 자주 볼 없다고 생각하니 결혼식에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딸아이는 뭐가 좋다고 결혼식 내내 싱글 벙글이다. 결혼식 후 서울을 여행해보니 상하이와 크게 다를 건 없다. 드라마에서 보던 멋진 곳들은 실제 여행할 때는 별로 보이질 않는다. 남편과 달리 내겐 음식도 잘 맞지 않는다.
상하이에서도 결혼식을 했고, 사위가 다행히 중국 난징(남경)에 일자리를 잡았고, 딸아이가 남편을 따라 남경으로 갔다. 어떻게 공부시킨 딸아이인데 남경으로 가더니 딸아이는 일을 하지 않고 가정주부로 만족한 듯싶었다. 사위가 괘씸하기도 했다. 상하이 사위였으면 직장도 잘 다니고 바로 옆에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딸아이는 일도 하지 않고 자주 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1년이 흘렀다. 이것들이 아주 남경에 살려고 하는지 남경에 집을 산다고 한다. 게다가 남경에서 발 마사지 가게를 한다고 한다. 어떻게 공부시킨 딸인데 직장을 다니지 않고 장사를 하다니 집안사람들에게 창피해서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아이를 가졌고, 가게를 정리하고 아이 놓을 준비를 하려 상하이에 있는 우리 집으로 딸아이가 들어왔다.
손녀딸을 놓았다. 내 딸아이는 엄마가 대부분 키워주셨고, 그렇게까지 이쁜 줄 몰랐는데 손녀딸은 너무 이뻤다. 딸의 기저귀나 똥을 치워준 적도 거의 없이 남편이라 엄마가 대부분 치워주었는데 손녀 딸 것은 더럽지 않아 내가 똥을 치우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했다.
좋은 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니 몸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사위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게 들어온다. 이렇게 집안일을 하지 않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주말에도 일을 하러 나간다고 한다. 무슨 주말에 일을 하는 회사가 다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일을 할 때는 오전만 일하면 할 일이 없어서 오후에는 수다를 떨거나 요리할 재료를 사놓기도 요리를 미리 해놓기도 했는데 말이다. 딸에게 흉을 좀 볼라 하면 득달같이 지 남편 편을 들어서 제대로 불만을 이야기해본 적도 없다. 이야기할 때마다 싸웠다. 눈치가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사위는 아무 불편함이 없이 편하게 잘 사는 듯하다.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었다. 딸이나 사위도 고마워하는 마음도 별로 보이지도 않는다. 화를 냈더니 위안을 해주는 게 아니라 딸아이도 내게 오히려 화를 낸다. 그럼 너네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는 집으로 와버렸다. 아쉬우면 자기네들이 빌러 찾아오길 기대하며 말이다. 기다렸으나 연락이 오질 않는다. 2주 후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손녀딸을 보냈다고 한다. 딸아이의 성질머리 하고는... 절대 자기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 성격이다.
만 3살 때 가서 만 4살 때 손녀딸이 돌아왔는데 손녀딸이 중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급한 마음에 사위에게 통역을 요청해서 왜 우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대화 안 되는 손녀딸을 다시 키우느라 한참을 고생하기도 했다. 다시는 한국에 보내지 않으리라...
2년 후 딸아이와 싸우고 한번 더 한국에 보내기도 했다. 이때는 어눌하긴 했지만 중국어를 다 잊지는 않았다. 다만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하니 열심히 중국어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그 숙제
사위는 왜 한국 여자를 두고 우리 딸아이와 결혼을 결심했을까?
5년이 넘어서야 그 답을 풀었다.
사위는 한국에서 결혼할 여자를 못 구한 거다. 그래서 우리 딸과 결혼했다는 결론이다.
<사위 입장>
아내로부터 연애할 때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다.
왜 자기랑 연애하냐고?
결혼할 때가 되자 같은 질문이 문장만 바뀌었다.
왜 자기랑 결혼하냐고?
결혼을 하고 나니 같은 질문이 역시 문장만 과거형으로 바뀌었다.
왜 자기랑 결혼했냐고?
나중에 알았다. 그게 자기 질문이 아니고 장모님 질문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대답을 했음에도 그 대답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5년 넘게 같은 질문을 했다.
나의 대답은 5년간 한결같았다.
"미쳐서"
그러더니 5년 후 나의 한결같은 대답은 무시하고 자기네들끼리 맘대로 결론을 내더라 ~
한국에서는 결혼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하긴 아내의 베스트 프렌드와 그 남편이 한국에 놀러 왔을 때였다.
홍대에 데려갔고, 함께 거리를 걸었고, 홍대 소주방에 함께 가서 한국 술 예절도 가르쳐주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많은 여성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더니 그 아내 베스트 프렌드의 남편이 큰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니 이렇게 이쁜 여자들을 놓아두고 왜 아내랑 결혼했어?"
물론 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믿든지 말든지 말이다.
오늘의 주제인 장모님으로 돌아가 본다.
장모님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딸이 연애를 하지 않을 때는 평생 혼자 살까 걱정을 하고,
막 연애를 했을 때는 한국에 따로 여자 친구가 있으면 어떡하냐고 걱정을 했고,
그 걱정이 사라지니 딸의 모난 성격 때문에 헤어지면 어떡하나 걱정을 한다.
한국에 결혼식에 잠시 오실 때는 한국에서 음식 적응을 어떻게 할지 걱정을 하고,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탈 때는 비행기 사고가 날까 걱정을 하고,
결혼을 하니 딸을 못 볼까 걱정을 하다.
남경에 살 때는 둘이 밥은 제대로 먹을까 걱정을 하고,
딸이 남경에서 일을 하지 않으니 여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걱정을 하고,
남경에 집을 산다고 하니 남경에 계속 눌러살까 걱정을 한다.
딸이 장사를 하니 남 볼까 창피하다고 걱정을 하고,
또한 실패할까 걱정을 한다.
손녀딸을 당신들이 보냈으면서 손녀딸 한국에 잘 있나 걱정을 하고,
사위가 손녀딸을 잘 돌보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고,
손녀딸이 아파서 사위가 휴가 내고 혼자 돌본다고 하면 손녀딸을 과연 혼자 잘 돌볼 수 있을까 걱정을 한다.
사위가 사업 준비하러 6개월간 한국에 간다 하니 한국에서 다른 여자를 찾을까 걱정하고,
또한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황당했다.
딸과 사위가 직장에 다닐 때는 잘릴까 걱정을 하고,
그래서 둘 중 한 명은 사업을 한다고 하니 사업은 잘될까 걱정을 한다.
상하이 이외 지역 외지인들을 무시하지만
외국인 사위로부터 무시당할까 걱정한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조금은 더 이해가 된다.
장모님은 여리고 세심하고 센스가 있고 걱정이 많은 분이더라 ~
이해하면 미워할 일이 줄어든다. 한때 미워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이해가 된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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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은 브런치 북으로 발행했습니다.
속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 1부가 도움이 될 듯해서 아래 링크를 걸어둡니다.
[브런치 북] 상하이 여자 vs. 한국 남자 (brunch.co.kr)
전편은 우리나라의 이웃인 중국. 그중에서도 한 도시인 상하이의 일반적인 이야기와 우리와 다른 문화 그리고 약간의 저희 경험을 담았습니다.
속편은 12화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편: 10화, 속편: 12화)
주 2~3회로 생각하고 있고요. 글쓰기 초보라 일정이 늦어지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 댓글을 주시면 초보인 제게 힘이 되어 글을 마무리하는 힘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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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