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말기 암환자인 시아버지와 함께한 나의 6개월
그렇게 집으로 모시고 큰 결정들이 끝나니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에겐 일상 같지 않은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행히 시아버지는 매 끼니 고깃국을 찾으실 만큼
입맛도 좋으시고 소화도 잘 하시는 것 같았다.
퇴원하고 며칠 죽을 드렸더니
남편에게 죽만 먹어서 기운이 없다는 투정을 하셨다고 하는 걸 들으니
아프신 게 맞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겐 저질체력이라는 엄청난 복병이 있었다.
결혼 후 생각지도 못하게 곧바로 아이가 생기면서
일 욕심이 많은 나에게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은
감당하기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우린 아이를 친정이나 시댁에 맡길 수 있는 상황도 되지 못했다.
거기다 아이가 6개월쯤 됐을 때 시어머니가 쓰러지셨는데
남편은 본인 회사 근처 요양병원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점심시간마다 나의 시어머니, 본인의 엄마를 보러 갔다.
점심은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해결하면서.
(이 일을 두고 우리 엄마는 보통 착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고 나 역시 동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길 수도 없었기에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했다.
1년 반 정도 프리랜서로 낮에는 아이를 보고 밤에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아들이 유치원에 가게 되면서
(아들이 네 돌이 지날 때 즈음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9 to 6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간과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는
수면시간이 건강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고
아침마다 얼굴이 퉁퉁 부었다.
어느 정도로 부었냐면
하루는 지각을 해서 상사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러
상사의 자리로 갔는데 상사가 내 얼굴을 보고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만큼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병원을 찾아 혈액검사를 했고
검사 결과 호르몬 쪽에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갑상선 기능 저하, 다낭성 난소 증후군에 부합하는
수치가 측정되었다.
그리고 비타민 D 수치는 '4'라고 나왔다.
그 해, 추석 전날 아침에는
시아버지가 산책 가신다는 말에 누워있다가 인사를 하러 일어났는데
순간 내 시야가 까맣게 변해 있었고 왜 이렇게 턱이 아픈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턱이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2018년은 그렇게 내 몸 상태가 최저점을 찍을 때였고
결국 다음 해인 2019년, 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그렇게 좋아하는 일도 쉬면서 몸 상태를 회복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좀 괜찮아지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
job offer와 시아버지의 병간호의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었다.
사실, 제일 크게 다친 추석 연휴 턱주가리 사건은 비하인드가 있는데
내가 다쳤던 추석 연휴 2주 전부터 시아버지는 우리 집에 계셨었다.
그 해 7월경, 캐나다에 사는 시누 집에 2달을 계시겠다며
시아버지는 에어캐나다 왕복 티켓을 준비해 떠나셨다.
(여든에 외항사 여객기를 타고 열세 시간을 가는 용기 리스펙)
인천공항까지 라이딩 해드리고 돌아오는 길
그래도 한 달은 계시지 않을까라는 우리 부부의 예상을 깨고
가신지 2주 만에 한국에 가고 싶다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복으로 샀던 티켓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오는 티켓을 예매해
3주 만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인천에 발을 디디자마자
고등어조림이 먹고 싶다 하신 말에 난 고등어조림을 준비해서 상에 내었었다.
그렇게 추석 2주 전 도착하신 시아버지는 겸사겸사
추석 때까지 서울에서 지낼 생각이셨던 거였고
나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추석 때까지 꼬박 회사도 집도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나는 꽤 예민해져 있었을 거고
남편과 나는 티격태격 해놓고 둘 다 티 안 나게 한다고
했지만 티가 안 날 수는 없었을 거다.
시아버지 입장에선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본인도 화가 나니 우리 부부를 앉혀놓고
시아버지라면 할 수 있을법한 소리를 하셨을 거다.
하지만 2주 이상 버티던 예민 보스 저질체력의 나는
그 일이 스트레스의 정점이었을 테고
이래저래 겹쳐져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바닥에 턱을 찧으며 장렬하게 피를 흘렸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주변을 돌아보니 집 안이
그렇게 엉망일 수 없었고 아이 밥만 겨우 챙겨 먹이던
내가 보였다.
이래서 건강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몸으로 마음으로 체감을 하고
겨우 나와 내 주변을 추스린 와중에
시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상황에 당면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난, 체력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모두 여유가 없었다.
사실 1월 한 달 동안 언제 요양병원으로 가시나
구정이 지나면 본인이 직접 간다고 하시겠지
이런 막연한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도 있다.
집에 계시는 동안 반찬도 국도 모두 사서 차려 드렸다.
깜빡하고 밥이 떨어진 날은 햇반을 드린 적도 있었다.
아픈 분께 직접 음식을 만들어 드리지 않고
국도 반찬도 사서 차려도 되는 거냐고
그렇게 모실 거면 모시지 않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도 시누도 아닌 그저 지인이 말한 것)
물론 직접 하지 않는 일에 오지랖 넓은 누군가가
쉽게 던지는 한 마디쯤 무시해도 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건 왜일까.
밥이라도 꼬박꼬박 제때 해서 드렸으면
지금 마음에 남아있는 것의 무게가 덜했을까?
어찌 되었든 시아버지는 사 온 음식이든 만든 음식이든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꼬박꼬박 드시는
전형적인 옛날 스타일인 반면
나는 밥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짧디짧은 입을 가진 사람이었고
유치원 졸업을 앞두면서 집에 있게 된
아들의 점심까지 겹쳐서 챙기고 난 날이면
난 밥보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바빴다.
그렇게 설 연휴도 지나고 2월도 반이 지나고 있었건만
요양병원에 ㅇ자도 나오지 않아
결국 내가 남편을 섭섭하게 할지라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시아버지는 요양병원에 가실 생각이 1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