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말기 암환자인 시아버지와 함께한 나의 6개월
서울에 있는 아들 곁으로, 또 큰 병원으로 오니
시아버지는 조금 마음이 편해진 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간 병원은 송파에 있는
A병원이었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동관-본관-서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병원 안에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며 일처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역할을 나누기로 하였는데
남편은 시아버지와 함께 본관 의자에서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달래는 일을,
나는 행정적인 업무 처리를 하는 것으로 정했다.
본관에서 진료의뢰서와 검사 결과지 등을 제출하고
서관에 있는 진료과로 가서 진료 접수를 하는 일을
재빠르게 처리한 뒤 진료 볼 때에 맞춰 남편에게
진료과 앞으로 시아버지를 모시고 오도록 하였고
그 일련의 일들을 1분이라도 빨리 처리하기 위해
그 큰 병원을 뛰다시피 걸었다.
(그 날의 바쁨과 아득함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다행히 진료 당일 입원이 가능해
시아버지는 입원을 하셨고 일단 간호사에게 부탁해
'검사 결과는 환자에게 직접 말하지 말고
보호자에게 알려달라'는 비밀유지를 부탁했다.
사실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숨긴다는 사실이 비난받을만한 행동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판단 기준은 이러했다.
우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눈에 띄게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신 데다
심약해지셨던 시아버지가 3년이 지난 즈음에야
겨우 슬픈 기운을 털어내고 새롭게 본인의 생활을 하던
찰나였기에 본인의 몸에 큰 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바로 알려드리면 크게 실의에 빠지실 것 같았다.
(평소 성격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도.)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귀가 밝지 않으신 데다
소위 말하는 서울말, 표준어에 익숙하지 않은
시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왔다는 사실을
좋아하시긴 하셨지만 종종 의료진의 말을 못 알아
듣는다는 사실에 위축받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의료진과 라포 형성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적인 병명을 전해 듣는다는 것이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결과에 대해 먼저 듣고
전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검사는 PET-CT와 췌장 조직검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기저질환으로 가지고 있는
간경변과 부정맥에 대한 추가 검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미 이전 병원에서 찍은 CT를 가지고 의사 선생님과
초진을 볼 때, 췌장암 진단을 하시면서 PET-CT로
전이 유무와 기저질환에 따른 항암치료 가능 유무를
종양내과 선생님과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셨기에 우리는 그저 진행이
더디 되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검사 끝에, 결과가 나와
보호자와의 면담을 앞둔 날, 시아버지 병실에 있다
집으로 가던 길에 나는 간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일 오후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을 위해
반드시 자리를 지켜달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그때부터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던 나는
다음날 서둘러 친정엄마에게 아들을 맡기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의사 선생님을
겨우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전 수술일정 때문에
수술복을 입은 채로 급하게 병실로 찾아오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췌장 꼬리에서 시작한 암은
우측 신장과 복막에도 전이가 되었다는 것,
배꼽 쪽으로 돌출된 피부 조직 역시 전이된 암의
일부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여명은 3~6개월 정도로
본다고 말씀해주셨다.
사실 약속시간은 5-7시쯤이었는데 담당교수님과
만나게 된 시간은 9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행여 저녁 먹으러 간 사이에 선생님이 오시면
어쩌나 싶어 저녁까지 거르고 꼬박 9시까지
기다린 끝에 만나게 되어 당시엔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몸이 더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2시에 들어간 수술이 늦게 끝나
그렇게 되었다며 가운은커녕 수술복을 입은 채로
다급하게 와서 설명을 해주시곤
시아버지께는 수술 대신 약으로 치료할 거라며
최대한 에둘러 설명해주시고 다독여주는
담당교수님의 모습에 지쳤던 몸도 마음도
위로를 받는 듯했다.
사실, 환자와 환자 보호자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다.
특히나 큰 병일수록 믿기지 않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진단명일수록
젊은 전문의 선생님보다는 나를 담당하는 교수님을
직접 만나 듣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
환자와 환자 보호자 입장의 간절한 마음이다.
종종 그것을 권위에 의존하는 천박한 마음이라
일축하고 환자 1명이라도 더 볼 시간이
부족한 나에게 감히 설명을 요구해?라는 표정의
의사들을 의도치 않게 몇 번 만나본 기회가 있었던
나에게 담당 교수님은 보호자에겐 차분하면서도
정확하게 진단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도
환자에겐 따뜻한 지지를 해주는
큰 병원에서 보기 힘든 선생님 중 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암이 전이되었을 때는
수술을 할 수 없는 데다 환자가 고령인 점,
환자의 기저질환 등을 감안하였을 때
항암으로 암의 진행을 막으면서 남은 생의 기간을
늘리는 것을 치료의 주안점으로 두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시며 우측 신장으로 퍼진 암 조직 때문에
막힌 요관에 스텐트 시술을 해야 한다는 협진 내용까지
듣고 집으로 돌아오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생각이 잘 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때부터 점점 명확해지는 사실 하나는
지금 현재, 이 상황을 보다 빠르게 파악하고
앞으로 닥쳐올 일처리를 현명하게 해야 될 사람은
며느리인 '나'로 귀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의 누나들과 여동생에게
이 내용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남편에게는 2명의 누나와 1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제일 큰누나는 시아버지 댁 근처에, 둘째 누나는 서울에,
여동생은 캐나다에 살고 있다.
그러나 믿기 어렵게도 요즘 세상이라 말하는
2020년 이때에, 남편은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이유로
나는 며느리라는 이유로 걱정과 안타까움은 물론
모든 시간과 에너지, 각자의 스케줄 조정과 같은
모든 물리적, 심적 스트레스를 함께 버무려
갈아 넣고 있었고 시누 3명은 각자의 자리에서
친딸만이 가질 수 있는 걱정과 안타까움을 갈아 넣고 있었다.
흔히들 이야기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그리고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더 아픈 손가락과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그런데 왜 우리 남편이 더 아픈 손가락인지
(실상 곱게 자란 거 같아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래서 더 큰 책임 앞에 서야 했는지,
그로 인해 그의 와이프인 나는
모든 에너지를 이 일에 쏟아부어야 했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때쯤, 사실 나는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고 조금 들뜨기도 했던 것 같다.
평소 일 욕심이 많은 나에게 온 한 마디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이유로
집에 주저앉게 되었다.
'아픈 시아버지의 병수발'
2020년 1월, 그렇게 나는 본격적인 '보호자'라는
터널 입구에 서 있었고
세상은 중국의 박쥐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1월에 걸맞게 모든 것이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