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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다시 들이고,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한 출정식

by 박수경

2025년 5월 29일


새벽 6시 25분에 잠에서 깨었다. 교회 계단에서 넘어진 뒤로 어깨가 계속 아프다. 어이할꼬…


얼마 전 『그렇게 우리는 문장이 되었다』. 삼다 수업을 하고 책을 내었다. 두 편의 글이 나의 일부이다.

무슨 글을 쓰고 싶어 일어났을까?

어떤 시간으로 채워질까?


마흔다섯은 그래도 세상에서 비껴 나와 명랑해도 그런가 보다 할 나이인데,

쉰이 넘으면 명랑하게만 글을 쓰면 그때는 비난이 뒤섞일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글을 쓰는 법을 배우고서야 알았다.


나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글쓰기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다듬고 고치고 다시 숙고하고 지난한 퇴고 과정을 거쳐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는 걸 이제야 안 마흔다섯 살의 내 나이에 글을 과연 쓸 수 있는가…


지구불시착 동네 서점에 갔을 때, 지구불시착 사장님은 독립 서적도 입고하고, 스스로 본인이 책을 내기도 하고, 국제도서전에도 참가하며 시를 함께 짓는 모임부터 다양한 시도를 책방에서 하고 있다.


그분이 『그렇게 우리는 문장이 되었다』 책을 이야기하는 도중 이상하게 한 가지 내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일단 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겉표지에 집착하니, 글을 쓰면 표지는 출판사가 알아서 하는 것이니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글을 잘 써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정말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곁치레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정말 글의 내용으로만 승부하는 것이다.


요 근래 책을 사고 책을 모으면서 내가 참 겉모습에 많이 마음을 쏟았구나 싶었다. 글이 중요하다. 표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 보니 어떤 글을 지면으로 인쇄할 때,

그것이 일러스트 에세이집이 아닌 이상 글로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게끔 묘사되어야 한다.


난 왜 내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그림이나 사진으로 꼭 형상화하려 했을까…

오랫동안 SNS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되어 버린 모양이다. 글과 사진이 기본 올리는 틀이 되어 버렸으니,

관찰력은 줄고 보여주려고 하는 것. 아…


이십 대에 내가 가졌던 포부나 맹랑함은 사라졌지만

되찾고 싶은 게 있다면, 여리고 수줍어서 상대에게 내 속내를 잘 보이지 않고, 혼자서 여러 생각으로 지새우다가 결국은 입을 닫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고 이런 순기능이 되었던 나의 모습이 온데간데없고, 수다스러워지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해 놓고 후회하고…


며칠 전 갔던, 서점에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보라색으로 띠지를 둘러놓아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오래전에 읽은 박준의 『계절산문』을 펼쳤다.

거기서 오래전에도 봤을 텐데 하며 꺼내든 「정의」라는 글 한쪽에 무심히 머물렀다.


“사랑은 이 세상에

나만큼 복잡한 사람이

그리고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 『계절산문』, 박준


이 문장에 한참 머물러 한숨을 내쉰 건, 관계에 대한 것이기보다 ‘나만큼 귀한 사람이’였다.

나는, 타인을 참 귀히 여겼다.

조금은 어렵지만 늘 마음을 다하고 귀하게 여겨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반대로 했다.

나만큼 그 사람이 귀해서이기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정의 앞에 나는 내가 귀한 줄을 잊어버렸던 시간이었다. 내가 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에 가깝다.


이제 그 방식을 바꿔야겠다.

작은 차이지만,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

‘내가 귀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다른 사람을 귀히 여기는 일은 참 다르다.

그것이 정말 그 사람을 귀히 여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렇게 글을 쓰면 될 것 같다.

바꿔서 상대방만 귀히 여기다 보면 분명히 탈이 난다. 아프다.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참 살아볼 만한 거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난, 앞으로 나만큼 귀한" 사람들을 대하듯 이것을 기억하며 글을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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