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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

가만히, 걷는다.

by 박수경

20. 아이스아메리카노


어제, 아이들과 기차 카페에 갔다. 해가 길어지니 오후 여덟 시가 돼도 이제 캄캄하지 않다.


가끔 얘들과 총동원해 어딜 가보면, 얘들이 나와 놀아주는 것 같다. 매주 별일 없는 심심한 엄마를 위해 작은 이벤트를 열어 주는 것 같다.


오늘은 갑자기 작은방에 있던 책상을 버리자고 결심한 나 때문에, 재활용장까지 책상을 들고 가느라 아이들이 수고를 감당해야 했다. 음식물 쓰레기도 두 아들 녀석이 버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아들들은 심부름도 참 잘해 주고, 내가 발을 주물러 달라 하면 서로 한 발씩 하겠다고 성화다.


기본적으로 엄마가 좋아 늘 내 곁에 서성이는 녀석들이다. 엄마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내 딸, 아들과 다르게 나는, 칭찬거리가 생겨야 예뻐하는 나를 보며 자주 부끄럽게 한다.


어제, 아들이 주문하지 않은 아이스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 오며, 두 아들이 서로 이야기 나누기를, 엄마가 “오, 센스 멋진데”라고 해 줄 거라며 기대했단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원래 아이스커피는 먹지 않지만, “음, 아주 잘했어” 하며 마셨다. 결국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동안 내가 잘했어라는 칭찬에 인색했나 싶었고, 그건 남편에게도 적용해야 하는 것 같았다.


아무 조건 없이 날 좋아해 주고 찾아주는 녀석들, 고맙다.

“엄마도 아직 엄마가 되고 있어.” 미안해 속으로 몰래 한숨짓는다.


며칠 전 읽은 『오늘도 책을 권합니다』 노희정, 소동,

책 속의 책에서 언급된 글귀가 생각난다.


위기철 작가의 『생명이 들려준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이지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가 자라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처럼.


아직,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미 어른의 성숙한 모습을 강요하거나 기대치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안쓰러운 아이가 되게 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21. 무제


이건 비밀인데 8개월간의 글쓰기 수업을 듣고 나서 배운 게 아주 많았다. 글쓰기 정석을 배운 후 그 뒤로 글 쓰면서 아쉬운 건원래 내가 글 쓰는 방식이 희미해져 간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는 게 글쓰기의 완성이 아니지만, 뭔가 흐름이 끊긴 듯 잘 다듬어진 글을 보고 있자면, 나도 내 글을 남의 글 구경하듯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가? 싶어지는 것이다.

혹은 한껏 꾸민 듯해 예쁘기도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훌훌 벗어던지고 싶다고 해야 하나, '아유 모르겠다.' 일단 써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어떤 글이라도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다.


며칠 전,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 이소연, 앤드 산문 내용 중 퇴고 연습을 첫날 진행하는데 J는

“전 퇴고하고 싶은 곳이 없습니다.”

프로그램 이름이 “퇴고 연습”이고 애초 콘셉트가 그런 건데, 이건 또 무슨 난관이란 말인가?

“전 제 시가 마음에 듭니다. “라고. 쐐기를 박았단다. 어디 가서 흔들림 없이 말하는 J를 보며 그동안 누군가 좋다고 말해 줘야 겨우 좋은 시가 되곤 하던 자신의 쓴 시들을 되돌아보게 했다.라고 쓰인 에세이를 읽었다.


짧은 에피소드 속에서 나 역시 글을 쓰고 스스로도 감탄해 줘야겠다. 싶었다. 퇴고도 당당히 하고, 내가 하루의 어떤 시간을 베어 쓴 글을 더욱 매만져 당당히

“저는 제 에세이가 마음에 듭니다. “라고 확신을 가질 때까지 조금 많이 엉성하게 느껴지는 나의 글을 사랑하기로 한다.


22. 루틴


14,375원이라는 인세를 받고 그동안 나의 씀씀이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후원을 대책 없이 했던 이유 중 하나는 후원금액이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삶을 이어가는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을 벌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매달 일정 금액이 월급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월 수입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의 사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의 루틴_&출판사 속 시 쓰는 루틴을 소개한 김승일 작가는 장마가 오지 않은 여름이 가장 좋다고 한다. 온도를 에어컨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모든 환경과 조건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 시 쓰기에 적합하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인간이 어떤 최적의 조건의 반복은 자신이 살아가는 루틴을 반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준다는 생각을 했다.

수입도 그렇지 않을까? 하물며 일정한 저축은 어떨까, 이번 달 씀씀이가 많아져 카드값을 내고 7월에 들어갈 돈이 많아질 듯하여 매달 자유 저축액을 일부러 넣지 않고 있다가, 아침에 ‘해보자 한번’ 이러며 계좌이체를 했다.

내가 컨트롤되는 나의 최적의 상황을 만들기 연습을 해보자.

이런 글도 글이라면, 글을 쓰면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지 매일 써보는 것이다.


23. 아름다움


요즘 일거리가 줄어들어 잘 쉬는 남편. 아침에 일어나 저녁 설거지를 하더니, 내가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하니 돌아와서 배고플 테니 밥을 해 놓으면 먹으란다.

냉장고에서 별거 별거 다 꺼내기에 뭘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응 기간이라 30분을 놀고 나서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왔다. 카레 냄새가 나서,

나는 그냥 카레를 먹는 줄 알았는데 카레 돈가스라니…

오호, 별미로구나.

맛있게 잘 먹었다. 누가 차려주는 밥 아름답다. ㅎ

먹는 게 참 행복이구나 싶다.


김승일 작가를 앤드 출판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아름다움에 관해 쓴 시를 읽으며

‘아름다움은 어쩌면 이런 종류였구나’ 하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도 대단한 것보다 조금 좋은 것을 볼 때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 같고, 그런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아름다움』 중에서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이나 대단한 예술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아름다움이란 엄청나게 멋진 게 아니라, 아주 조금 좋은 것에 불과하다."


24. 칠월


핸드폰을 일부러 두고 온 것은 아닌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가방에 놓고 나와 약 30분여를 걸었다. 핸드폰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며 무작정 시나브로 걸었다. 좋았다.


  핸드폰을 만지지 않는 시간은 놀고 있지 않는 집안일을 하거나 분주한 시간인데, 나의 삶은 핸드폰이 내 손에 없을 때 생산적인 시간이구나, 집이 잘 굴러가는 시간이구나 싶다. 하물며 몸은 어떠랴. 막내가 어린이집에 낮잠까지 자는 시간까지 적응하면, 기본 30분 이상은 걸어야겠다.


  걷는 동안 참 좋았다. 평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풀 내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사물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7월이다. "7월은 치뤌이다." 라며 발음할 때 어쩐지 춤추는 듯하다. ‘줄라이’도 내 마음에 쏙 든다. 내가 에세이 겨우 두 편을 넣은 공저 책을 냈을 때, 온전한 책이 아닌 듯하여 사실 부끄러운 내게 이름조차 에세이스럽다며 칭찬해 준 분이 있다. 삶은 이런 작은 호응으로 살아갈 만해지는 것이다. 칠월, 참 예쁜 단어다. 칠월에게 갖은 애교로 아부해 본다. 이번 칠월에도 잘 부탁해.


25. 산책

아이가 두 시간 동안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걸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2시간여 동안 4,769걸음을 걸었다는 것을 만보기로 확인했다.

생각보다 만 보 걷는 것이 꽤 먼 거리구나. 다음에는 좀 더 멀리 걸어봐야겠다.

문득, 정말 고요해진 사람들은 SNS도, 어쩌면 핸드폰도 필요 없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약 두 시간여 동안 자연에 푹 빠져 있었던 시간이었다. 육아의 고달픔만큼이나 자연이 주는 넉넉함을 느꼈다. 걷기 시작하자 내 다리에 반응하는 몸의 움직임, 모든 것이 좋았다. 감사한 산책이었다. ^^


26. 걷는 사람, 하정우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칠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 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젓지 말고 가만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나는 생각들을 이어가다가 지금 당장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 그냥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 편이다. 살다 보면 「답이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게 만드는 문제들을 수없이 만난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 해결하고 싶은 조급함 때문에 좀처럼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순간 우리는 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답이 없을 때마다 나는 그저 걸었다. 생각이 똑같은 길을 맴돌 때는 두 다리로 직접 걸어 나가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page. 166


지난번 호모북커스에 갔을 때 은근슬쩍 추천해 주신 책이라 다녀오자마자 구입했다.

겨우 며칠 걷고 걷기 예찬을 하기에는 좀 머쓱하지만, 걷기로 인해 혼자 그 시간을 온전히 집중하면서 얻는 평화가 얼마나 좋던지 무작정 계속 앞으로 걸을 예정이다.


27. 아기가 열이 난다.


새벽에 일어났다. 어린이집 적응하느라 막내딸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늘부터 어린이집에 길게 맡기려고 해서 뭐 할지 들떠있었는데 고것이 엄마 곁에 더 있겠다고 작고 작은 발바닥이며 손바닥이며 이마가 열이 난다.


여름이라 며칠 밤에 더워 에어컨을 틀었더니 그런 듯하다.

자면서도 몸이 뜨거운걸 바로 눈치채고 일어나 해열제 먹었더니 열은 내리고, 다시 잠들었다.

생각해 보면 여섯 자녀 모두 12개월 이상 모유수유로 내 품에 품어서 키우다 보니 아기가 조금만 이상신호가 와도 연결된 듯 바로 안다. 오늘은 소아과에 가고 어린이집은 쉬어야겠다. 어제의 잠시의 휴식이 아이를 간호하는데 큰 힘이 되었기를, 아자!


요즘, 나 스스로 나의 좋은 점과 좋은 상황들에 대해 나 스스로가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감사하도록 좋은 점을 찾으려 노력한다. 내가 해석하는 내가 어쩐지 부정적인 요소가 많았던 것 같아서이다.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싶고 하고 싶다. 그것이 내 몸에 마음에 각인되도록 그리하여 내 몸과 마음이 8월의 태양의 열기처럼 건강하길 바라본다.


어젯밤, 남편은 닭볶음탕을 한 솥 만들어 아이들과 먹었다. 김에 참기름과 소금을 뿌려 구워주기도 했다.


다섯째가 학교 가다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밑이 다쳐 발레도 쉬고

방과 후 수업도 못했지만, 그만하길 다행이다 싶다.


다시, 천천히 가보자.


28. 이곳에서


며칠 동안, 왜 나는 이곳에 시간을 내어 머무르고, 내 이야기를 적고, 때로 이곳의 분들과 교제하며 아주 오랫동안 블로그나 인스타, 브런치 같은 SNS를 할까?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 기록하기 위함이다. 기록은 일기장에 혹은 비공개로 해도 되는데, 굳이 브런치에 옮긴다. 하물며 일기를 쓰더라도 그것이 기록이 되면 타자는 자신이 된다고 한다. 자신에게도 쓰는 글쓰기를 통해 나는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두 번째, 보여주기 위함이다. 어? 뭐라고?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그렇다. 나의 삶이 비록 비루하고, 사는 게 힘겨움의 연속이며, 실수투성이에 연약함이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늘 차고 넘쳐도, 그런 어려움들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법이니 그럴 때마다 함께 읽으며 위로받거나, 즐거운 일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싶다.


세 번째, 오프라인 삶만 살기에는 건조하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삶의 사람들, 관계, 내가 해야 하는 일, 이 세 가지에 집중해 본 적도 있었다. 오프라인 삶에 우선순위를 두는 건 맞지만, 오프라인의 삶만 살아내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결핍된 게 있다는 걸 오래전에 자주 느꼈다. 이곳에 나의 마음을 나누면서 실제 내가 원하는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이기적이겠지만, 나를 위한 것.


내가 오래전부터 손에 꼽고 애정하는 봄날의 책 『가만히, 걷는다』는 신유진이 엮고 옮겼다. 모파상의 태양 아래에서 그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실제로 그 나라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지만, 그가 추구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 역시 그렇다.


흘낏흘낏 내가 수락하고 그들이 곁을 내어 준 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상상해 본다. 어떨지, 도움이 필요할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필요할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가만히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내 곁에 있는 이들은 강해지고 아름다워졌다. 나는 그것에 매우 보람과 감사를 느끼며, 나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언제나 바라봐 주고 응원하고 있으며 불편할 때조차도 감내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준다. 책, 속


한 문장을 소개한다.


플로베르는 때때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막을, 피라미드를, 스핑크스를 보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지만, 자기 집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터키 이발사의 머릿속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그 이발사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 구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 뵐게요. 읽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더워진 여름 건강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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