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2] 수취인 불명의 편지

by 용호


역사의 가장 그늘진 곳, 해가 들지 않는 자전거 주차장에 늘 자리를 잡고 있던 그들을 기억하니. 마트를 갈 때마다, 코인노래방을 갈 때마다, 심지어는 목적지 없이 산책할 때에도 우리는 그곳을 지나쳐야 했어. 우리는 내심 무심한 척하면서도 눈치를 봤지. 시선을 거둔 뒤에도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뒷덜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어. 나는 네가 걸음을 재촉하는 걸 알았다. 그런데 나는 가끔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걸, 너는 알았을까.


“나는 그 사람들이 무서워. 미래에 내가 그렇게 될까 봐.”


언젠가 너는 말했다. 살짝 떨군 눈빛은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신코에 고정한 채, 아침에 본 뉴스거리나 오늘 먹은 점심을 전하는 것처럼 무감한 투였어. 나는 그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는데, 그건 그 순간 네가 그네를 멈췄기 때문일 수도 있고, 때마침 매캐한 매연이 바람결에 실려 왔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 어쩌면 아무도 없는 공원의 침묵 속에서 발화된 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평일 한낮의 공원이라는 건 그런 법이었으니까. 도서관에서 이력서를 쓰다가 열패감에 젖어 바람을 쐬러 나온 우리뿐이었어.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어르신 몇몇만이.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는 않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그러하듯이, 네가, 그리고 우리가 미래를 두려워한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그런데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미래를 두려워했던 것이 맞을까. 두려워했던 것은 미래라고, 우리에게 내어줄 것이 한 톨도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미래가 우리에게서 달아났다는 생각이 들어.


잠을 줄여가며 밤낮을 헌납하고 눈에 실핏줄을 세우는 정성. 그 정도의 정성은 악착같이 들여야 겨우 한 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너는 내게 가르쳐 주었지. 그러고 보면 청춘에게 시간만큼은 충분하다는 속언은 얼마나 무지하니. 우리는 그 시간마저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쓸 수 없었는데 말이야.


너는 목표로 한 회사에 입사해서 한동안 조용했다. 반년쯤 지나서야 기별을 해온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어.


“사람들이 이상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지 않다는 듯 말하는 너를 나는 그리워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지. 옥상에서 담배 연기에 은신한 채 나누는 밀담을, 군사독재 시절에 머물러 있는 상명하복 문화를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어. 나는 그저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위로하고, 듣고, 공감하고, 듣고, 응원하고. 너를 그리워했던 만큼 열심히 들었어. 너의 문자는 알람 시계처럼 아침 출근길 같은 시간에 도착했지. 어쩌다 너에게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나는 무슨 일이 있나 전전긍긍하다가, 이내 잊었다. 나의 회사 생활도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투성이였으므로.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너는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나는 낯선 언어로 쓰인 글을 독해하는 것처럼 그 문자를 몇 번은 읽었지. 그 일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


'그동안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나 때문에 네가 힘든 걸 생각하지 못했네. 너에게 큰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야. 이제는 널 힘들게 하지 않을게. 앞으로 하는 일 모두 잘 풀리기를 바라.'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4년도 넘었어. 그런데 얼마 전, 회사에서 마지막 출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왜 갑자기 그 문자가 생각났을까. 그 문자를 보내고서 너는 괜찮아졌을까.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에서 당연한 일을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네가 정말 그런 삶을 살기를, 안녕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걸까.


나는 다시 평일 한낮에 마트를 가고, 코인노래방에 가고, 목적지 없이 산책하는 사람이 되었어. 한동안은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틀어 놓은 채 낮이고 밤이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지. 언젠가는 밤중에 아프리카 초원에서 치타에게 쫓기는 가젤을 다큐멘터리에서 보았어. 나레이션은 이렇게 말했다.


“운이 좋게도 가젤은 살아남았습니다. 최대 시속 100km까지 전력 질주하는 가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죠.”


그 나레이션이 어찌나 우습던지. 한동안 그 대사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혼자 찌개를 끓이다가 흥얼흥얼, 샤워를 하다가 흥얼흥얼. 운이 좋게도 가젤은 살아남았습니다. 운이 좋게도 가젤은 살아남았습니다. 운이 좋게도….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들을 다시 관찰하게 된 게 언제였더라. 7080 팝 라디오 채널을 틀어 놓고서 선잠을 청하고, 막걸리 한 사발 부딪히며 호탕하게 폭소하고, 서로 머리채를 붙잡고 엉겨 붙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손 맞잡고 차차차를 추는, 그 신기하고 이상한 사람들 말이야.


어느 날은 그들 사이에 못 보던 얼굴이 등장했어. 나이는 많이 쳐봐야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통통하게 살집이 오른 체구에 유유한 행동거지가 인상적인 여자였어. 그리고 그 머리칼, 허리춤까지 치렁치렁한 머리칼은 절반 정도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지. 나는 그 누런 머리칼을 보는 순간 메두사의 얼굴을 본 것처럼 굳어버렸다. 왜인지 그게 섬뜩했다. 거기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는 것처럼, 버튼을 누르면 '뻥' 굉음을 내는 폭탄 장난감이 어린이집에 있는 것이나 사무실 귀퉁이에 숨죽인 채 잠복해 있는 CCTV를 본 것처럼 몸도 마음도 굳어버렸어. 나는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그 여자를 찾았다. 언제나 여자는 보란 듯이 거기에 있었어.


여자는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서풋서풋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예의 진지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면, 상대방도 진지한 표정으로 화답했어. 시종 소란스럽던 그들도 그때는 소리를 죽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어.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리도 진지하게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늘 그랬지. 나는 그들이 항상 궁금했다. 노숙하게 된 사연이, 노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연이, 노숙이 당연해진 사연이 미치도록 궁금했어.


봄이 저물어갈 무렵에는 새로운 할아버지가 나타났어. 단언컨대, 그는 노숙인이 아니었지.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에게 배부하는 조끼를 입고선 아침마다 자전거를 끌고 나타났고, 저녁이 되면 홀연히 사라졌거든. 그는 보통 하나뿐인 나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다가 가끔 부리부리하고 형형한 눈빛이 나와 부딪힐 때면, 나는 엄청난 비밀을 들킨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돌려야 했어.


있지, 사실 요즘 나는 그들과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 며칠을 응달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가 이따금 양지바른 풀밭에 둘러앉아 일광욕하는 그들에 속하는 상상을 한다. 천진하게 “언니! 언니!” 하고 달려가는 단발머리 중년 여자 뒤를 따라가 그들이 둘러앉아 만든 둥근 원의 일부가 된다. 마냥 하하호호 웃다가 지치면 다시 응달로 돌아가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커다란 캐리어를 베고 곤히 잠든다. 그러고 나면, 내가 지닌 우울과 불행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될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 왜 왔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을 해야지.


“짓밟고 올라설 타인의 불행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미래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났니. 너의 프로필 사진은 5년째 빈칸이고, 나는 너의 안부를 물을 수가 없다. “마음이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해줘”라고 보낸 나의 마지막 문자에 찍힌 하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과거에서 조금도 멀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같은 자리에서 구덩이를 파고 또 파서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지난한 세월을 보고, 너는 뭐라고 말해줄까. 무섭다고 할까. 이상하다고 할까. 운이 좋지 않았구나,라고 할까. 나는 네가 무엇이든 말해주기만 한다면, 찌는 듯한 한여름의 중천 아래서도 아주 단잠을 잘 것만 같다.



-202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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