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슬픈 것을 좋아하는 마음
Lauv <Modern Loneliness>
어쩌다 거울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몹시 당황스럽다. 익숙한 얼굴인데 꼭 다른 사람의 얼굴인 것만 같다. 흡사 한때 친했으나 멀어진 친구를 재회하는 기분이랄까. 세월을 거치며 그 얼굴에는 왜인지 슬픈 감정이 고여 있다. 겉으로는 온갖 풍파를 이겨낸 어른인 양 의연하게 구는데,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으면 슬픔의 늪에 잠겨버릴 것만 같다.
내 슬픔의 늪은 아주 긴 시간을 자양분 삼아 깊어졌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조금씩은 슬픈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난 뒤에도, 시험을 순탄하게 마치고 난 뒤에도, 이국의 여름 휴양지에서도 나는 남몰래 슬픈 표정을 지었다. 먼 미래에도 우리가 지금처럼 함께할 수 있으려나. 시험이 끝났으니 또다시 삶의 목표를 찾아야겠구나. 이렇게 좋은 곳을 곧 떠나야만 하겠지. 내 감정의 침로는 관성적으로 슬픔을 향했다.
김치나 된장은 숙성할수록 이롭다는데, 왜 슬픔은 그렇지 않은지. 하물며 기쁨과 분노와 권태와 같은 다른 감정은 시간에 묵혀두면 언젠가 깨달음을 주는데, 왜 슬픔은 시간이 쌓이는 만큼 야금야금 부패하기만 하는지.
감정의 기원을 찾는 일은 실로 지난한 작업이다. 나는 내 슬픔의 뿌리를 찾고자 침잠하고 몰두하였으나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럴듯한 가설을 세울 수는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매우 독립적인 아이였다. 그럴 듯한 자아가 생겼을 무렵 혼자 살겠다고 다짐했고, 청소년기의 거의 모든 선택은 혼자 살아가기 위한 예행 혹은 준비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혼자 살아갈 사람이 가장 잘 간수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감정, 그중에서도 슬픔이었다.
요컨대, 슬픔을 볼모로 동정이나 연민을 요구하는 사람은 혼자 살 자격이 없었다. 혼자 살 사람은 슬픔을 혼자 감내할 수 있어야 했다. 슬픔을 들어줄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할 테니, 혼자 삼키고 소화하고 배설할 책임이 있었다. 칠칠찮고 청승맞게 슬픔을 전시하는 치 앞에서 사람들은 ‘저러니까 혼자지’라며 세 치 혀를 쉽게 놀렸다. 기왕 혼자 살 거라면, 아주 떳떳하게 살아야 했다. 나는 슬픔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지독하게 편협한 취향은 아마도 그런 성정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어딘지 조금씩 슬픈 구석이 있는 것들. 조금 슬픈 음악, 조금 슬픈 책, 조금 슬픈 영화. 미안하지만 무턱대고 슬프기만 한 것은 사양이다. 눈물샘을 쥐고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들, 이를테면 신파로 범벅이 된 아침 드라마나 2000년대 정통 발라드 같은 것에는 심드렁하다 못해 치가 떨린다. 때로는 조금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너 울 수 있잖아. 슬프잖아. 이래도 울지 않을 거야? 눈물을 갈취하는 편집에 굴복하면 결국 울어버린 약자가 되고, 저항하면 피도 눈물도 짜게 말라버린 냉혈한이 된다.
망망한 바다에 잔물결이 일 듯, 마음에 고요한 파고를 일으키는 것들은 나의 속마음을 똑 닮아있다. 때로는 음악과 책과 영화가 사람보다 낫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슬픔을 의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것만 같다. 구태여 말을 고르고 마음을 편집하지 않아도, 가만히 공명해주는 존재들이 얼마나 귀한지 나는 일찍이 깨달았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조금 슬픈 사람이다. 어딘지 조금 슬픈 사람을 발견하면 어찌할 방도 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건 사랑보다는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고, 연민보다는 동료애에 가까운 감정이다. 외계 행성에 불시착해 혼자 살아가다 우연히 지구인을 만났을 때의 감정이 그 감정과 닮아있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딘지 조금 슬픈 사람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 내지는 이끌림을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조금 슬픈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꼬깃꼬깃 접어 호주머니에 간직해 둔 쪽지를 건네듯 담담하지만 서투르게 전하는 이야기가 어떤 백 마디 고백보다 마음을 더 동하게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도 내게 조금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많은 사람은 침묵하거나 멀어져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우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좀체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슬픈 사람은 아주 겁이 많다는 것을, 아주 가끔 대단히 용감해질 때는 마지막을 염두에 둘 정도의 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종결되는 비극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사실도. 나 역시 그렇게 누군가에게서 도망쳤는데, 그 마음을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따금 조금 슬픈 것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고장 난 수도 같다고 생각한다. 감정의 배관이 망가져 슬픔을 뚝뚝 누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슬픔을 조금씩 흘려보내면서, 사람 아닌 것들에게서 조금씩 위로받으면서 지금 버틸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너무 치밀했다면, 한 방울의 슬픔도 새지 않았다면, 언젠가 막힌 배관이 펑 하고 터져서 만신창이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반면 무작정 감정의 수문을 열어버리고 살았다면 삽시간에 완전히 고립되어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장 난 것들을 쓰면서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내가 칠칠찮게 흘리고 다닌 슬픔을 누가 발견해 버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거울 속의 나를 보다가 다시 한번 다짐한다. 절대 이 슬픔을 들켜서는 안 된다고, 나는 밝고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것은 생의 안위가 달린 문제라고.
그런데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얼마 전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조깅을 하러 나섰다. 비가 오지만 비가 와서 나간 것이었다. 나는 이따금 무작정 뛰고 싶은 사람이었고, 우중런을 하면 숨 막히는 여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빗발이 그리 세지 않기도 했다. 의외로 공원에는 드문드문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걱정을 덜었다.
두 바퀴를 돌았을 즈음, 비구름이 점점 짙어지더니 삽시간에 비가 모자를 뚫고 눈으로 들이닥쳤다. 꾸역꾸역 목표로 한 거리를 채우고 귀가하는 길엔 그야말로 물에 젖은, 아니 물에 잠긴 생쥐 꼴이었다.
“저기요.”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였다. 처음엔 나를 부르는지 몰랐다. 연이어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봤을 뿐이었다. 휴대폰 대리점에서 몸을 반쯤 내민 청년은 팔을 쭉 뻗어 내게 우산을 건네고 있었다.
“이거 가져가세요.”
“아, 저 괜찮아요.”
“빨리요. 안 갖다주셔도 돼요. 저 다 젖어요.”
남자는 조급해 보였다. 비가 와서 우산을 안 쓰고 나온 거예요. 우중런을 하고 왔어요. 비 맞을 각오를 했으니까 우산은 필요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이내 단념하고 우산을 받았다. 우산이 필요하지는 않았는데, 막상 우산을 쓰고 있으니 안심이 됐다.
공원을 빠져나와 사거리에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고, 등 뒤에 있던 매장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건 1초가 될까 말까 한 찰나였지만 남자는 뛰쳐나와 우산을 건넸다. 그날 머릿속에 그 장면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그리고 온종일 나는 한시도 슬픔을 가둬 두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언젠가 견고한 새장을 뚫고 나온 슬픔이 주변을 헤집어 놓을 미래가 두려웠다. 하지만 다른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그 두려움 역시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얼결에 우산을 건네받고 나면, 슬픈 마음이 잠시나마 잠잠해질 것이다. 아직은 그렇게 믿을 수 있었다.
조금 슬픈 음악처럼, 조금 슬픈 책처럼, 조금 슬픈 영화처럼 나는 언제나 조금은 울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좀체 울지는 않는다. 다행히 그런 음악과 책과 영화를 사람들은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어디가 슬프냐고 의아해한다. 신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이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2025.07
마음 생태보고서
수심: ●●●●◐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고백」,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20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