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만족도 곡선이 양의 기울기를 가진 아래로 둥그런 이차함수처럼 보이고, 내가 지금 가장 최소값을 가지는 꼭지점 부근에 있다는 건 잘 알겠다.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어렵고 헷갈리고 잘 모르겠던 때가 있었을까? 서양에서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있고 그 바퀴를 돌리는 운명의 여신이 있는데, 머리채마저 잘 잡히지 않도록 보통 머리를 꽁꽁 묶어버린 그 운명의 여신은 장난을 잘 친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점을 보러 갔다.십여년만이었다. 아이가 노래를 하고 싶다는데 잘 될까요. 거기서는 가다가 이 길이 아니네,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그게 맞든 틀리든, 운명의 여신이 지금 장난을 치고 있는 것임은 어느 정도 맞아보인다.
깊이 파인 중년의 곡선은 얼핏 보기에도 함정같아 보인다. 뒤로 돌아갈수도, 앞으로 뛰어나아갈 수도 없다.
수산나타마로의 '마음가는대로'에서 손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할머니는 이렇게 쓴다. 쓴다. '대개 사십대쯤되면 세상에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 이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야. 많은 사람들이 아주 폐쇄적 운명론에 빠지게 되거든, 하지만 운명의 실체를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세월이 흘러야한다'고. 나는 사십대 중반에 이 구절을 처음 접하고 과연? 하다가 과연!하면서 아직도 운명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아, 한 달만 쉬었으면 좋겠다.' 저녁에 산책하겠다며 나가서 끊었다 피웠다 하는 담배를 꺼내며 지친 기색으로 남편이 말했다. 그럴 만도 하다. 20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일해온 사람이다. 그도 중년의 지하 터널을 걷는 중이다. 우리 집은 아이들의 사춘기와, 제 2의 사춘기라고 하는 오춘기까지 구춘기, 아니 이 증폭효과는 곱하기일지도 모르니까, 이십춘기이다. 이 소용돌이 안에서 내 갱년기는 슬그머니 명함을 내미려다가 주춤, 했다. 그는 몇년전부터 돌파구로 사진에 빠져 한참을 은하수를 따라다니는 히치하이커가 되었다가 지금은 예술가에 걸맞는 '아호'를 고심하다가 이름까지 바꾸고 싶다는 단계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빨간색 스포츠카를 사고, 가죽 점퍼를 입던 얼마나 많은 중년은 이젠 갑자기 등산을 하고, 열정열정!을 외치고, 맨발걷기를 하고, 철인3종경기에 나가는지.
우리의 감정과 관계란 얼마나 카멜레온 같은지, 아니 카멜레온이 되어야하는지. 변하지 않는 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라니.
우리나라 최고령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나이 50이 되어야 자식을 잘 키웠는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지금 50에 다가가는 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것같다. 사람은 50이 되어야 자기 자신이 어떤 자기 자신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것 같다. 그전부터 존재해왔지만 뚜렷이 인식되지는 못하던 자기 자신. '나'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 사춘기라면, 이제는 그 '나'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깨닫게 되는 때인 것 같다, 분명히. 그렇지만 운명은 아직도 실루엣밖에 비추지 않는다. 저 골목끝을 빠르게 돌아가는 운명의 뒷모습의 실루엣, 그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 지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