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느 운동을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렇듯 운동을 싫어한다. 회사 다닐 때 매년 했던 건강검진에서 '일주일의 운동횟수는?'이란 질문에 항상 '1회 미만'을 체크해야했고 언제나 '운동 요함' 이란 소견이 따라 나왔었다. 그래도 나는, 여느 운동을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꾸준히 운동을 하지 않았다. 올초 내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가 켜지면서 관리를 해야한다는 절감이 들었을 때도 집근처 실개천따라 걷기를 하면서 나름 '파워워킹'을 하고 있다고 위안하고 있던 터였다. 그마저도 더울 땐 덥다고 나가지 않았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가지 않았지만.
그런 내가, 갑자기 등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계단을 보면 일단 숨찰 것 같다는 생각부터 하는 내가? 등산이라는 것은 원색의 등산복을 입고 '열정열정열정!'을 외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한다고 치부한 내가? 세상에서 정말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가보다.
소위 중년의 무기력함에 빠져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나는 '어딘가로'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조금 힘들게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멘탈의 문제는 피지컬로 풀어야한다'고 했던가.
나는 지역카페에 '근처에 가볍게 등산할 만한 산이 어디인가요?' 질문부터 올렸다. 내가 모르던 작은 산들이 이런 저런 이름을 달고 드러났다. 그저 항상 나의 곁에 있었지만,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산이 되어 다가온 지형들.
그러나 등산 초짜인 나는 등산안내도라는 것도 너무 낯설다.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있을지 걱정부터 된다. 그리고 혼자라는 것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그 사람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수 있다. 남편과 같이 갈 수 있는 주말에 드디어 올라갈 수 있었다.
정말 미스테리인데, 왜 나이가 들면 운동을, 등산을 하게 될까? 중년매뉴얼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있는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정말 산을 오르고 싶어서 가는 첫날, 눈을 비비고 세수를 오랫동안 한 후 물을 한병 담고, 양말에 운동화를 신고,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산을 향해 일요일 이른 아침의 공기속에 뛰어들었다.
그 후로 나는 혼자서 매일 아침 그 작은 산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어느 날은 항상 올라왔다 내려왔던 길 말고 다른 사람이 내려가는 길을 따라서 가보기로 했다. 대체로 목적지에 닿기는 하겠지만, 사실 처음 나는 고작 30분도 안될 그 길에서 길을 잃을 걱정부터 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개, 내려가는 길도 여러 개이다.
실제로 걸을 때는 바로 눈앞의 길만을 볼 뿐이다. 눈 앞의 길만을 보며 걷고 있을 때는 불안하지 않다. 길이 굽어져있거나 갈래가 나눠져있으면 망설이게 된다. 나도 새로 가보기로 한 그 길에서 앞에 가던 사람이 안보여서 갑자기 불안해졌다. 길은 그런 것이다. 길을 걸을 때는 대체로 끝까지 조망할 수 없다. 굽어져 있는 길에서는 일단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길까지만 걸어가보기로 한다. 거기까지 걸으면, 또 길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 길까지만 열심히 걸으면 된다. 갈래가 나눠지면 '남이 잘 가지 않는 길' 이나 '남이 잘 다녀서 닦아놓은 길'중 선택해서 걷는다. 단순하다. 그 선택에 옳고 그름은 없다. 짧은 길을 걸으면 좀 더 쉴 수 있고 긴 길을 걸으면 운동을 많이 할 수 있으니까. 남이 잘 가지 않아 덤불이 발을 방해하는 길은 좀 더 모험이 가득할지도 모른다. 남들이 많이 다녀서 바닥이 잘 골라진 길은 마음이 편할 거다. 인생이란 길처럼.
몇년전 그렇게 집근처 산을 오른다고 전화를 했던 먼 곳의 한 지인이 생각났다. 산을 오른다고? 우린 같은 부류인줄 알았는데? 지금 산을 오르며 생각해보니 그가 참 외로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저마다 외로웠고 저마다 얼마나 자신이 모르는지 말할 때 가장 편안했던 것 같다.
삶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짓는 순간 운명은 우리보다 상상력이 풍부햐서, 정말로 모든 것이 가장 바닥이라고 생각될 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버릴 수 있단다. 누가 알랴, 나의 다음 목표가 지리산 종주가 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