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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Oct 22. 2023

19.포도밭

'인생이 내추럴해지는 방법'이라는 포도 농사를 짓는 이야기에 관한 책에서 농사지을 땅을 찾아다니는 작가에게 이웃 할머니는 "농사는 뭐하러 지을라캐? 얼굴 시커멓게 되고 허리 꼬부라들고 폭삭 늙는다. 시작하면 그만둘 수도 없어. 절대 하지 마라."라고들 말린다. 오 마이갓. 이거 꼭 자식농사 그 얘기아닌가.  

아 그러니까요. 고생이네요. 이걸 왜 하냐구요? 모르니까요. 해봐야 아니까요. 고생을 한번 하고 싶어서요. 무료한 것보다는 고생이 낫거든요. 고생이 인생의 정수라고,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이젠 쉽게 내 입밖으로는 도저히 말 못하겠지만. 

결심이 필요한 순간, 이라는 책에서 한 경제학자는 사람들은 정녕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일들-결혼이나 자녀양육과 같은-한없이 손해로만 보이는 일들을 하기로 결심하고, 행하는 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길은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성숙을 위한 것이라고.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명제가 진실이라면(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니까 노년이라지만), 맞다. 하하, 나는 정말 이전의 나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숙해진만큼, 그만큼 아프다. 귤은 상처가 많이 날 수록 스트레스를 받아 에틸렌이라는 물질이 나와 더 달콤해진다지. 아픈만큼 달콤해질까? 정말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일까. 

나는 그동안 마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기 질환의 인정 5단계, 부정,분노,타협, 우울, 수용을 거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눈을 뜨고 있다가 갑자기 캄캄해진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있다가 뜨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실수나 실패를 했다고 후회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없다. 우리는 어떤 수를 써도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과학으로는. 이 도시에 살고 싶고 저 도시에도 살아보고 싶지만 동시에 살 수는 없다. 아니, 동시에 살고 있다 해도 알아차릴 수 없다. 저 멀티버스의 벽장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건강을 위해 '잠'을 강조하는 한 인문학자는 유튜브에서, 인간이란 활동하기 위해서 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위해 활동한다는, 즉 사실은 자는 것이 디폴트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자는 것이 디폴트인 내가 매일 아침 이렇게 눈을 뜨고 깨어나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일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가 아니라 '매일 기적을 일으키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린 매일 축하를 하면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 누가 배신을 하더라도, 그 어떤 배신을 당하더라도, 그 배신은 차라리 나이기 때문이다.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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