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은 이용자 연령에 따라 크게 어린이자료실과 종합자료실로 나눌 수 있는데, 요즘에는 그림책이 어린이자료실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른 자신을 위해서도 다양한 이유로 그림책을 읽는다. 요즘은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도 그림책 읽기를 권유하고 있다.
그림책안의 따뜻한 어른, 친구, 동물, 어린 날의 어떤 단순한 목적없는 추억들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지워졌던 많은 책임들, 함구했던 감정들, 의젓하게 보이기위한 과도한 긴장된 몸짓들이 없었던 그 시절, 지나고보면 다 좋았던 것같은 그 시절의 한 켠에서 느꼈음직한 안온한 느낌을 잠시나마 재회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림책의 그 '그림'들도 우리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감동을 준다. 어쩌면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볼 수 있는, 단지 약간의 시간을 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어른의 '그림책 읽기'와 같은 일들에서 우리는 찰나여서 더욱 강렬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마치 어린이날같은 일이다. 어린이날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린이였을 때 그 날은 그렇게 크나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 바로 그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그냥 그 실체였기때문이다. 5월만 되면 어린이날 '행사'니 풍선이니 노래니, 선물이니, 잡지의 특집이니가 가득한 기억은 있다. 나는 어린이만화잡지의 표지와 내지에 어린이날을 기뻐하는 어린이들이 가득한 그림을 본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특히 어린이날을 즐겼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린이 자체였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이 정말로 특별해진 것은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난 다음이다. 내가 부모가 되고, 우리가 부모가 되고나서 우리는 아이를 위해 어린이날을 기억한다. 내 어린 시절에 하고 싶었으나 못했던 것이라 생각한 것들을, 되도록 많이,준비한다. 그래서 어린이날은 사실, 어른을 위한 날이다. 어른에게가 아니면 어린이날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처음부터 어린이날을 아는 어린이는 없다. 어린이날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어른이다. 크리스마스라고 말해주는 것은 어른이다. 그래서 어린이날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림책 또한 어른이 되어서야 진정한 그림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린이를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는 미래의 반영이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반사됨으로서만 정체를 가지는 상대적인 존재. 그림책은 시간의 반영된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