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꿋꿋이 버텨 이제 봄을 맞나 보다 들뜬 마음의, 노랗고 가녀린 몸들이 하나씩 타들어가고 있다. 비가 오지 않아 대지가 건조하지만 이른 아침에는 간밤의 습기를 약간이라도 품고 있어 잔디를 태워도 잘 번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일이 태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게 낫다. 마른 잔디에는 워낙 불이 잘 붙어 약한 바람에도 순식간에 번질 수 있어 아주 위험하다. 물 한 동이 옆에 놓고 가스건으로 옮겨가며 태운다.
쭈그리고 하다 보니 힘이 들어 풀 뽑는 의자에 앉아 태운다. 잔디 옆에 낙엽을 치워가며 태운다. 낙엽에 붙기 시작하면 옆으로 번지기 쉽고 낙엽은 잔디처럼 실오라기가 아니기에 더 위험하다. 구석구석 남은데 없이 태우려 애를 쓰다 보니, "너는 무슨 권리로 나를 태우는가?" 묻는 소리가 들린다. 노란 잔디가 뜨거운 불에 마르며 붉게 타들어 가는 찰나에 검은 실오라기로 "휘리릭"사라지는 것을 보노라니 화형 집행자가 따로 없다. "휘리릭" 다 탄 것 같지만, 돌아보면 속살은 노랗게 보이기도 한다. 모진 인간은 구석구석 찾아 다시 태운다. 처절한 다비식이 아침부터 벌어지고 있다.
나는 잔디를 좋아한다. 초록색을 좋아해 잔디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만...
초록의 잔디밭을 곁에 두고 싶어 전원생활을 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아니지만, 초원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작은 잔디밭이지만 그나마도 듬성듬성 잔디가 나지 않은 곳도 많지만, 초록의 푸른색이 좋아 잔디를 둔다. 사실 잔디는 관리하기 힘들다. 그래서 돌이나 시멘트로 마당을 정리한 집들도 많다. 잔디밭에는 풀도 많고, 벌레들 특히 진드기가 있어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 마당엔 "잔디밭"이란 말이 어울리게 풀도 많다.
이 잔디밭이 어떤 잔디밭인가. 우리 강아지들이 봄으로 여름으로 추워지는 겨울 전까지, 좋다고 밟고 다니는 잔디 아닌가. 진드기가 무서워 강아지들에게 진드기 방지약을 뿌리고 바르면서 정작 잔디에는 약을 뿌리지 않았다. 잔디만 죽인다는 특성화시킨 독약이란 생각에 뿌리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한 번씩 태워서 진드기나 벌레 등을 제거하고 깨끗하길 바랄 뿐이다. 초록의 푸른 몸으로 올해도 잘 자라길 바라며 정화시키는 것이랄까. 잔디를 태우다 보니 파릇파릇 풀이 더 돋보인다. 어쩌랴! 함께 살다 때가 되면 뽑기도 하겠지만, 민들레도 들풀도 마당 잔디밭의 일부인걸...
잔디를 태우면서 반 철학자가 된 듯하다. 이기심과 더 나은 삶에 찌들어 버린 정신과 마음을 끄집어내어 깨끗이 태워버리고 싶다. 바라는 소망이라는 미명 하에 재워 둔 욕심들을 끄집어내어 다비식을 하고 싶다. 아니다. 잔디를 태우면서 나의 이기적인 마음과 놓아버리지 못하는 끈들도 함께 태우고 있다. 재도 남기지 않고 순간으로 날아가버리는 잔디처럼 가볍게 날아가버리길 바라면서 나도 태우고 있다.
인생은 "불멍"에 가까울까 "잔디 멍(내가 붙인 잔디 태우는 순간이다)"에 가까울까? "불멍"일 때도 "잔디 멍"일 때도 있을 것이다. 타오르는 불을 "멍"하게 바라보며 "자작자작"소리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잠시라도 "공허"의 순간을 음미하는 "불멍"은 재가 되는 순간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잔디는 태우면서 "멍"할 순간이 없다. 금방, 찰나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어쩌면 "불멍"보다는 "잔디 멍"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간이란 잔딧불처럼 타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면, 주어진 매 순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더 소중하게 사랑할 것은 확실하지 않을까.
지금은 까매져 버린 잔디밭이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태워버린 제 몸을 거름 삼아 더 푸르고 튼실하게 한해를 이어 줄, 푸르른 잔디로 커 갈 것이다. 이른 아침 잔디는 한 줌 재도 되어 보지 못하고 실오라기 같은 몸을 허공에 날린다. 공(空)으로 왔으니 공(空)으로 간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