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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Nov 28. 2022

"일기일회", 견(犬) 쌍두 마차와 오늘도 달려갑니다


 보리와 샐리는 운동 마니아다. 바라보는 인간의 표현으로는 운동이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선 사는 목적의 한 부분인 듯싶다. 암튼 만사를 제처 놓고라도 밖에 나가야 적성이 풀리는 아이들이다. 녀석들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해야 하는 건 산책 담당인 내 몫이다. 초겨울인 11월인데도 아주 춥지 않아 고맙긴 하지만, 아침부터 부산 떨며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는 일은 적절한 사명감 없인 힘들다.


내려갈 때는 성질 급한 푸들, 샐리가 언제나 앞선다. 계속 킁킁거리며 냄새를 즐기면서 자신의 흔적도 남기고 앞서면 보리는 조용하게 따라오며 산책을 즐긴다. 돌아오는 길엔 둘이 비슷하게 걷는다. 같은 옷을 입혔더니, 두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채찍이 아닌 사랑과 격려를 받으면서 달려가는...


견 쌍두마차를 타고 단풍 속을 날듯걸어간다. 거의 다 떨어진 단풍 낙엽은 사각거리는 음악소리를 넘어 폭신한 촉감까지 전해준다. 형형 색색의 단풍 낙엽을 마음껏 밟으며 걷는다는 것은 산책 중에서도 호사스러운 산책이 아닐까 싶다. 온갖 색으로 깔린 주단 길을 걷는 기분이 이럴까...


두 녀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나를 잘 끌고 간다. 나의 쌍두마차는 걸어가는, 때론 끌려가는 마차다. 이 마차의 연료는 무엇일까?  견 쌍두마차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사랑의 힘으로 달려간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힘이 달리게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는 강아지들의 사랑이 원동력이다.


강아지들이 주인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좋아할 뿐이다. 물론 "밥 챙겨주고 간식 주고 좋아하는 운동도 시켜주니 좋아한다"라는 생각은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답이다. 매일 해주는 일이 달라질 때가 있어도 강아지들은 그저 좋아한다. 강아지들이 사랑하는 덴 이유가 없다. 그게 사람하고 다른 점이다. 그냥 사랑할 뿐이다. 좋기에 그저 좋아하는 것이다.


쌍두마차에 끌려가면서도 두 녀석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느낀다.

"조금 천천히 가자"

멈칫거리며 서있자, 두 녀석은 같이 멈춘다. 고개를 돌리면서 사랑에 절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당신이 좋아도 너무 좋아요"라는 표현이 눈빛으로 전해져 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아무런 이유도 대가도 없이 그저 내가 좋아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는 따르는 강아지들이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사랑하기만 한 적이 언제였던가 를 잠시 되뇌어본다.


때론 가장 평범하고 단순한 순간에서 삶의 깊이를 배워갈 때가 있다.

아침 산책길에서도 그런 경험을 한다. 오래전에 읽은 "일기일회"중 "삶 속에서 내가 정말 조촐하게 지니고 싶은 맑은 복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돌아보라"는 글이 생각났다.

스님은 조선 중기 장혼 선비의 "맑은 복 여덟 가지"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다. 첫째는 태평성대에 태어난 것, 둘째는 서울에 사는 것(예전 한양 시절이다), 셋째는 자신이 다행히 선비라는 직업을 가진 것, 넷째는 문자를 대충 이해하는 것, 다섯째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 하나를 차지한 것, 여섯째는 꽃과 나무 천여 그루를 가진 것(소박한 다른 의미의 취미로 해석해도 된다), 일곱째는 마음에 맞는 벗을 얻은 것, 여덟째로 좋은 책을 소장한 것으로 우리들 대부분이 갖추고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맑은 맘을 가진 소박한 선비는 예나 지금이나 평범함 속에 녹아있는 진솔함으로 행복을 누리고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 역시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던가. 오히려 복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사는 현실이지만 그중에서도 자신 있게 맑은 복,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나의 맑은 복 아홉 번째는 항상 곁에 있으며 사랑해주는 견공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늘 지나고서야 다시 깨닫게 되는 "한번 지나가버린 것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으므로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 지금 내게 찾아온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함부로 대하지 않아야 하는 삶의 진리"를 모든 찰나에도 적용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님은 "모든 것이 일기일회(一期一會)라고 한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다" 드물게 주어지는 귀한 기회나 중요한 결정 앞의, 관계 사이의 일기일회도 소중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접해가는 일기일회다.

우리 강아지들이 내게로 온 것도 일기일회였고, 함께 산책하고 있는 이 순간 역시 일기일회다. 주관적 입장에서 본다면 내게 온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잘 보살핀다지만, 우리 아이들도 순종하며 사랑으로 응답하고 있으니 소중한 연緣을 함께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날은 더 추워져도 여전히 산책을 즐겨야 할 아이들과 이제 동안거를 준비해야 하는 마당의 소중한 인연들, 내년 봄을 위해 마지막 걸친 옷까지 벗어던진 가녀린 나무들과 어디서 지내는지 모르지만 아침이면 찾아와 지저귀는 온갖 새들, 미리부터 염려되는 길냥이들의 매서운 겨우살이... 이들을 보살펴야 할 순간순간의 축복들이, 주어질 일기일회를 소중히 여기고 맑고 밝게 살아가야 할 것임을 가르쳐주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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