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와 발리야
나는 가끔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땅에 연인과 오직 둘만 남아있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그럼 그곳에서 과연 우린 웃을 수 있을까?
스테이션 안에는 한 남자가 난로에 나무장작을 넣어 불을 떼고 있었다. 쯔벤과 빠기는 그와 먼저 인사를 나누었고, 곧이어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는 유리, 그녀는 발리야였다.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어준 나리씨에게 들었듯 두 사람은 부부였다.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이곳의 몇 배는 더 큰 링잉스테이션을 오랫동안 운영했었고, 대자연에서 직접 생활을 꾸려가는 방법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몽골인 코디네이터가 해외 출장을 가면서 이 러시아인 부부가 스테이션을 관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소할 준비를 하는 어린 새마냥 그들을 쫒아다니며 이것 저것 배웠다. 그들은 탐험가이자, 생태를 관찰하는 것이 몸에 벤 연구자에 가까웠다. 말은 못했지만 일을 마친 오후에 두 사람과 함께 탐조나 트래킹을 하면서 ‘설마 저길 올라간다고?’, ‘설마 여길 내려간다고?’ 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한 번은 경사진 내리막길에서 내가 아주 조금씩 발을 내딛는 걸 본 발리야가 웃으면서 미끄러지지 않고 내려가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스테이션 네트 주변에 나무 다리를 직접 고치기도 했고, 야생동물을 관찰하기 위해 자연에서 구한 재료로 위장 울타리를 만들기도 했다.
두 사람을 보며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또 다른 모양의 독립성을 목격했다. 대자연이 터전인 그들이 길 없는 곳에서 걸어갈 길을 정하는 방식과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는 서로에게 짓던 미소가 주는 울림은 훗날 꾸려갈 것들에 작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거대하고 척박한 땅 위에서도 배꼽 빠지게 웃는 연인과 나를 상상해보는 이유는 삶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마땅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밀려오는 비장함에 짓눌리지 않고 때로는 가볍게 현상을 다루어낼 수 있는 관계성이 서로에게 있는지, 그것이 내겐 중요했다. 유리와 발리야 사이에 있는 연결과 유대감은 그런 것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서툰, 온실 속 도시인에게 그들은 너그러웠고 먼저 선뜻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곳에 있던 어느 날, 고마움을 담아 언덕에서 작은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어디서든 행복할 줄 아는 그들이 오늘도 여전히 웃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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