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을 얻게 된다는 것은
집으로 온 선거원 명부와 공보물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와 아내의 이름 아래에 딸의 이름이 버젓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거연령이 몇 해전에 이미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하향된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어리게만 여겨지던 딸의 이름을 선거명부에서 보게 되니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일 년 전 딸이 주민등록증을 만들었을 때에도 받았습니다.
반짝이는 주민등록증을 들고 돌아온 딸은 표정이 좋지 않았었는데,
그 이유는 역시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문득 제가 주민등록증을 처음 받았던 날을 생각해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에 불만인 것은 모두 마찬가지 심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고 자라면서 어떤 신분을 인정받게 되는 몇 가지 순간들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처럼 각기 다른 단계의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나
대학에 진학하여 보다 넓은 공부를 하게 되는 그 모두의 기간 동안
우리는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살게 됩니다.
학생은 말 그대로 배우는 중인 사람이기에
학생으로 사는 동안에는 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대우는 꽤나 너그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우며 자라는 동안
사회의 정식 일원으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는 일도 생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분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부담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만 18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결혼도 할 수 있으며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직접 뽑을 수 있습니다.
만 19세가 되면 성인이 되어서
모든 법적인 권리와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되죠.
학생의 신분을 지나면 취업을 해서 직업인의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남편 또는 아내의 신분을 가지게 되고요
아이를 낳게 되면 엄마와 아빠의 신분도 생겨납니다.
거기에 자동으로 딸려 오는 사위, 며느리, 처남, 동서, 올케 등등의 신분도 덤으로 오게 되죠
그러한 과정을 돌이켜 보니
주민등록증을 받거나 투표권을 가지는 우리 딸의 신분 변화는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에서 얻게 될 여러 가지 신분들에 대한 첫 단추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오는데
그것을 잘 해내면서 그 신분을 잘 유지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가 사는 과정이자 목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신분들을
원망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과 통해있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한을 새로이 가지게 된
'우리 딸의 선거권자 신분을 존중하고 축하합니다. '
함께 투표장에 가서 신기한 얼굴로 투표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도 예전엔 잘 몰랐으니까요.
우리 딸도 여러 가지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처음 투표하러 간 날을 떠올릴 날이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