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지 않았지만, 날 닮은 너
첫눈에 반했다.
영화 <비기너스>에서 깊고 따뜻한 눈망울로, 조곤 다정하게 위로를 전하는 덥수룩한 개.
그 담백한 바둑이가 믹스견이 아니라 '잭 러셀 테리어'라는 하나의 견종임을 알게 되면서_
그동안 영화에서 명연기를 보여줬던 그 많은 '개배우'들이 잭 러셀이었다는 것도 알았고,
우리에게 '이게 행복이야!'라고 몸소 보여준 공원의 바둑이도 결국 같은 친구라는 걸 깨닫고는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진 듯했다. 언젠가 개라는 생명을 책임지게 된다면, 꼭 잭 러셀 테리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견종 백과사전에서는 경고했다.
'개는 오랜 세월을 거쳐 사람에게 적응하고 맞추며 진화해왔다.
하지만 당신의 개가 잭 러셀이라면, 당신이 변하고 적응해야 한다.'
기상천외한 사고와 천인공노할 말썽으로 주인을 울리고,
나이 들어서는 의젓하게 효도해서 감동으로 울린다는 그 매력.
하지만 우리는 이미 깊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얘 빼고 다 귀여워!'라고 생각했던 못난이. 동배들은 다 멀쩡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잭 러셀 시그니처인 얼룩이 계속 밀려나는 바람에 꼭 대머리 같고, 눈이 두 배는 더 작아 보이는 '잭 러셀', 아니 흡사 '잭 니콜슨'. 우리는 수의사 선생님마저 빵 터지게 만든_ 억울하고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미운 오리 새끼를 입양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개를 선택한다고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다. 보통 샵에서 새끼 때의 외모에 반해 결정하는 경우가 많을 테니. 하지만 개는 본능적으로 첫눈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자신과 맞는 사람을 분별하며, 개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선택한다. 보호자는 그 개의 선택을 받는 사람이다."
퍼피만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도, 나를 봐달라는 간절함이 느껴지는 눈빛도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차분히,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무심(無心)의 느낌이 좋았다.
견생 3개월 차에 이런 느낌을 주는 댕댕이라... 왜 이 녀석을 보면 위로 한 마디 해주려는 느긋하고 따뜻한 노신사 모습이 오버랩될까.
되돌아 생각해보면 이 친구가 우리를 선택해 준 것 같다.
'이 어리숙하고 엉성한 인간들아, 나 정도는 돼야 너희를 돌봐 줄 수 있을 것 같아.' 하며
일반적이고, 안전하고, 무난하고, 안정적이고, 전형적인 것과 거리가 먼_ 이상하고 어설픈 우리에게 아장아장 와준 너.
'노자', '데리다', 혹은 '데미안'도 괜찮고, '푸코', 심지어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 '러셀'도 제치고_
몇 날을 고심 끝에,
우리의 강아지는 '다윈'이 되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비주얼에 이어, 한 번만 들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까지 더해져 마음에 들었고, 덥수룩한 턱수염의 젠틀한 양복을 차려입은 노년의 찰스 다윈과 꼭 닮기도 해서였다. 이름이기에 나름의 의미까지 덧붙이자면- 견생을 살아가며 스스로도, 그리고 함께 사는 우리도 날로 멋지게 진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할까.
다윈을 키우면서, 내가 공부한 것은 '강아지 잘 키우기'에 관한 것이었지만,
배우고 깨달은 건_ 사실 나 자신에 대한 것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 주는 다윈이 고맙다.
그리고 매일이 다르게, 나를 꽤 괜찮은 인간이자 쓸모 있는 어미가 되도록 만들어줘서_ 다윈에게 감사하다.
역시, 사람이든 개든 이름이 중요한 걸까.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_ '다윈' 덕분에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