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Animal Right)'에 대하여
"판사들끼리 만나면 뭐하고 놀아?"
"술 먹으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옳은지 떠들어. 지난번엔 개 이야기가 나왔는데_ 견주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차에 치어서 죽은 거야. 그래서 견주가 운전자를 고소했거든, 그래서 손해배상 판결을 어떻게 할 거냐고 토론한 거지."
"대한민국 주니어 판사들은 술 마시면서도 그렇게 노는구나... 지독하다! 그래서?!"
"어떤 애는 개를 가족의 일원 비슷하게나마라도 인정해주자는 논리였고, 반대는_ 원래 개는 견주 물건으로 보거든. 뭐 그동안 키우는데 들어간 돈이니 뭐니 다 필요 없고- 시가만 주면 된다는 거였지."
"시가?"
"개 값!"
판사가 된 대학시절 선배와의 술자리.
몇 년 전, 나는 그저 재밌다고 꺽꺽 웃어댔다.
그때의 내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아무 지각없이 웃어넘겼다는 것이_ 너무나 역겹고 창피하다.
무식하고 무지해서? 개념이 없어서? 아니다.
'내 일'이 아니라서다. 나와는 조금도 관계없다는 얄팍한 생각. 한 순간도 바라본 적 없는 무관심이었다.
'우리 아이가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떠났습니다...'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한 SNS 글에는, 반려견 카페에서 유박 비료로 인해 강아지를 잃은 아픔과 절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 카페에서 '유박 비료를 사용한 적은 있다'는 말도 들었고, 개를 잃은 후 다시 방문했을 때 쓰고 남은 유박 비료 봉투까지 봤지만_ 당시 현장에서 비료를 먹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제대로 된 사과도 듣지 못한 채, 생때같은 가족을 허망하고 억울하게 떠나보내야 했다.
그 일이 일어난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도 아파트 화단에서, 공원에서, 애견 운동장에서 같은 사고가 왕왕 생겼다. 견주는 더 이상 같은 비통한 죽음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_ SNS로 자신의 이야기를 알려나갔고, 유박 비료의 사용을 멈춰 달라는 국민 청원도 제기했다.
남편과 나도 SNS 챌린지와 국민 청원에 동참했다. 부끄럽지만 그제서야_ 다윈을 둘러싼 세상에는 참 많은 폭력과 비윤리가 만연해 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길 고양이를 학대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일도,
멀쩡한 비글의 눈을 실험을 한다며 뽑는 것도,
달리는 차에 개를 매달고 달리는 일도,
분풀이용으로 때리고 던지고 불을 지르는 사건도,
예뻐서 '샀다가' 싫증 나고 귀찮아서 쓰레기처럼 '버리는' 일도 있다.
다윈을 만나기 전 나였다면_ 이런 일들에 화르르 분노로 끓어올랐다가 또 금세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목적과 방향을 가진 이성적 판단 없는 가볍고도 간편한 감정으로, '미친놈 아니야?!' 하고는_ 또 바로 돌아서 잊었을 것이다.
동물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나와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몰랐다. 우리의 삶에 이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개'가 나타날 줄은.
다시는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말할 수 없다.
'미루거나 잊어도 될 중요치 않은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유박 비료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민 청원은 만 명을 조금 넘긴 참여로 결과 없는 끝이 났다.
그 밑에 동물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청원은 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국민 청원을 한 사람도, 동참한 견주들도 당연히 짐작했다는 입장이었다.
아직 시민의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굳이 동물까지 생각해야 하냐는 나중 일로,
유박 비료는 본 적도 없기에 자신과 상관없다는 일로,
그리고 자신의 강아지와 다른 견종이어서 내 일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동물은 아직도 소유자의 '물건'으로 취급받고 있다.
동물을 학대하면 3년 이하 징역, 3천만 원 이하의 벌금, 유기하면 3백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지만, 그렇게 잔혹한 일을 저지르고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사람은 아직 없다. 학대를 받고 있어도 '가해자'인 '소유주'에게서 구해내줄 수 없어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수사기관도 아직 충분히 적극적이거나 다각도로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개나 고양이는 스스로 증언도 할 수 없기에_ 더 즉각적이고 명백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데도 말이다.
동물은 '생명'이 아닌, '물건'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사람이 먼저지, 지금 개나 고양이가 문제야?'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다. 뭐가 먼저고 나중이냐는 논리가 아닌_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고통과 아픔, 행복을 느끼는 같은 '생명'으로서_ 당연히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고통과 이해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 다양할수록, 더 깊이있고 다채로운 삶의 행복을 느낀다.
“무관심은 가장 나쁜 태도입니다.”
95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_ 뜨거운 마음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참여할 것을 외쳤던 세계 인권 선언문의 주역인 '스테판 에셀'. 이 세상 제일 멋있는 할아버지의 '참여하라'는 부르짖음이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그의 말처럼 분노할 것이다, 나약한 감정에서가 아닌 '참여의 의지'를 가지고_
다른 소리를 낼수록, 그 소리가 작고 미약할수록 들어주고 싶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아동학대나 어린이들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환경과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_
아직 그 나이가 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노년층의 빈곤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약자여서,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결국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더 깊은 사랑으로 이끌고, 더 큰 사랑으로 이끌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