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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29. 2022

내가 웃는게 웃는 것이 아니었던 이유

달라도 예쁘다

럭비 월드컵이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거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부부젤라 소리가 들렸다. 이미 끝나버린 월드컵을 아쉬워하며 부부젤라를 불어대는 남아공 사람들이 꼭 몇 해 전, 2002년 월드컵 후유증을 앓던 우리를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그렇게 거리를 걷다 부부젤라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빨리 축구월드컵이라도 시작되면 좋겠다며 웃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길 위에 나 혼자 뿐이었고, 또 내가 마침 웃고 있었으니 나에게 묻는 질문이 맞는 것 같았다.


“아니, 월드컵이 끝났는데도 부부젤라 소리가 들리는 게 꼭 몇 년 전 우리나라 월드컵 끝난 뒤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나서요.”


그가 그 뜨거웠던 우리의 2002년 월드컵을 알랑가 싶었지만, 왠지 아는 것처럼 그도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미국에서 남아공으로 여행을 온 여행객이었는데, 마침 내일이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대화가 통하는 것이 신기하고, 남아공에서는 영국식 아프리칸 영어만 듣다 미국식 영어를 듣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었다.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던 찰나, 그가 말했다.


“우리 그래도 즐거운 대화를 나눴는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을까?”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나였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만난 미국 사람, 원어민과 그것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는 특별한 추억을 쌓았기에 같이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길을 지나던 행인이 있어서 사진 한 장을 부탁하고 우리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카메라를 받아 든 그가 사진을 확인한 뒤, 한 번만 더 찍자고 했다. 아마 눈을 감았나 보다 생각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다시 사진을 확인해보던 그가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표정이 어둡게 나와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진짜 웃으며 찍어도 될까?”


미소를 짓긴 했는데 무표정이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고, 그가 사진기를 받아 들고는 나에게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흠.. 나는 정말 즐거웠는데… 넌 별로 기쁘지 않았나 보다.”


이건 무슨 소리지. 세 번이나 사진을 찍었는데, 내 표정이 모두 같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무표정에 가까웠다 쳐도 나중에는 정말 웃었었다. 나는 아니라고, 진짜 웃었다고, 진짜 즐거웠다고 목청 높여 말했다. 그러자 그는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라며 진담 같은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끝까지 장난을 치며 우리는 진짜 웃으며 헤어졌다.


그렇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미국인 여행자와의 대화를 마치고 홈스테이에 돌아와 다른 하숙생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날이 좋아 마당에 있는 작은 테이블, 의자에 널브러져 앉아 여유를 만끽하며 모두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는 와중에도 방금 전 그와 찍었던 사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왜 나에게 웃지 않냐고 물었을까. 나는 분명 밝게 웃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는 왜 내가 웃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서? 사진 찍는 것이 어색해서? 내 표정이 어색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그가 내 미소에 인색했던 걸까. 대화를 나눴을 때는 무언가 잘 통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렇게 까탈스럽지도, 인색한 느낌도 없었는데, 아니었을까.


입 안에 음식들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머릿속에선 그가 했던 말, 그 미소의 수수께끼를 함께 곱씹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앞에 각자 앉아 의자 등받이의 역할을 제대로 만끽하고 있는 각 대륙에서 온 하숙생들 얼굴이, 표정이 하나 둘 내 시선에 들어왔다.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한국, 스위스, 아르헨티나, 남아공, 이탈리아에서 온 라틴계, 중동계, 코카시안, 동양인, 그리고 흑인까지. 태어나서 이렇게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과 지극히 일상의 시간 중 하나인 저녁 시간을 같은 식탁에서 얼굴을 맞대고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어쩜 신기하게도 의자 하나하나에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같은 흑인들이라고 해도 피부색마다 그라데이션이 달랐고, 같은 백인들이라고 해도 눈동자, 머리색이 달랐다.


그렇게 저녁 음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이 신기한 식탁 주변에 앉아 있는 지구촌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마침 무슨 재밌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까르르, 허허허, 하하하 웃는 소리가 이어졌는데, 문득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 하나 닮은 사람이 하나 없다 싶던 사람들이 모두 다 예뻐 보였다. 웃음이 터지면서 퍼져가는 눈웃음, 입꼬리가 열리며 드러나는 반짝이는 치아, 그리고 미소까지.


“그래, 이거였네! 그래서 아까 그 친구가 나한테 웃지 않는다고 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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