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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l 19. 2022

나의 가장 큰 선풍기

베를린 여름, 나의 팬


내가 베를린에 도착했던 날은 8월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름이라곤 했지만 필리핀에서 6년을 보내고 맞이한 베를린의 여름은 나에게 거의 초겨울 느낌이었다. 어느 하루는 너무 추워 8월에 처음 내복을 껴입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 여름도 두 번을 맞을 즈음에 덥게 느껴졌다. 분명 더운 여름은 맞았지만 베를린의 여름은 조금 다른 듯했다. 한국의 여름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장마 후 7, 8월의 미친 더위가 왔다가 어느새 가을이 떨어진 기억이다. 반대로 필리핀의 여름은 언제 시작됐고 끝이 있는지도 모르게 매일, 매달, 약간의 미열이 느껴지는 듯한 여름이 일 년 내내 계속된다. 다만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동남아라고 매일 35도가 넘는 더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것보단 조금 더 더운 그 열기가 오래갔다.


그런데 베를린의 더위는 뭔가 달랐다. 바로 건조함. 한국과 필리핀에서는 느끼지 못한 건조한 더위였다. 피부가 따가운 느낌에 건식 사우나에 있는 느낌이라 콧 속에 뜨거운 기운이 맴도는 여름. 며칠 동안 35도를 웃도는 기습 더위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 맹위가 일주일을 가진 않는다. 무척 더웠지만 다시 무척 시원해졌고, 선풍기를 살까 마음먹을라 치면 살랑살랑 선선한 바람이 불어버렸다.


그렇게 베를린에 온 지 2년 동안 우리는 선풍기 없이 두 번의 여름을 났다. 그리고 올해. 올해는 6월부터 갑작스러운 무더위가 찾아왔다. 35도를 넘어 36도를 넘어가던 날, 나는 선풍기를 주문했다. 선풍기의 종류가 많아 이런저런 기능들을 비교해보며 고심 끝에 선풍기를 주문하려는 순간, 남편이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에어컨도 아니고 선풍기 한 대를 사는 건데, 선풍기 한 대도 없이 어떻게 여름을 날 수 있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남편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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