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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Mar 13. 2021

누구나 지우고 싶은 흑역사 사진 한 장씩은 있잖아요

인도 기차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다




카주라호에서 다시 오른 세 번째 인도 기차. 우리 일행들의 마지막 목적지. 인도인은 물론, 세계인의 성지가 된 듯 한 갠지스강이 흐르는 곳, 바라나시로 향한다. 늦은 밤 기차에 오른 우리는 거의 기절하듯 기차 위 인도의 모습을 지웠다.


다시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고, 이제는 어느새 인도 기차의 뿌연 연기와 꾀죄죄한 풍경들이 익숙해진 것도 같다. 인도 기차 위에 있으면 지금이 몇 시인지를 물어서 무엇할 시간 속에, 여기가 어디인지를 물어서 무엇할 공간 안에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언제나 우리를 옥죄던 시간과 공간이라는 질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인도의 기차. 아무 생각 없이 더위에 녹아 2층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데, 갑자기 일행 중 한 명이 카메라를 보여줬다.


내가 자는 동안 장난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카메라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내 모습. 생각해보니 내 모습인데도 나는 볼 수 없고 꾸밀 수도 없는 것이 내 잠잘 때의 모습이었다. 마치 나무와 카멜레온처럼 정말 날 것의 그대로인 내가 인도 기차와 거의 혼연일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도 기차의 풍경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꾀죄죄하고 뿌연 모습이 고스란히 남겨진 내 얼굴과 몰골. 너무 못생긴 모습에 순간, 나는 그 사진을 당장 지우고 싶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실랑이를 하다가, 점점 내 표정이 어두워지고 진지해지는 것을 느낀 일행은 고분히 사진기를 넘겨주었다.


그렇게 지우고 싶던 사진이 들어 있는 일행의 사진기가 내 손에 들어왔다. 못생긴 사진을 삭제하려고 마지막으로 사진 속 내 모습을 살펴봤다. 까맣게 때가 탄 기차 시트 위에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는 듯 너무나 피곤한 모습으로 볼을 데고 누워 있는 내가 있었다. 순간 미래에 만날 내 딸을 보듯, 혹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을 보듯, 사진 속 내가 타자가 되어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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